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91학번에겐 차라리 서글픈 궤변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JTBC 정치부 차장대우

24년 전 오늘로 돌아가본다. 1991년 5월 18일. 이날 중앙일보 사회면은 온통 집회 시위 기사로 시커멓다. 당시만 해도 신문 기사 절반은 한자로 쓰였을 때인데, 그대로 옮겨본다.

 ‘시위·장례·파업…뜨거운 週末(주말)’ ‘望月洞(망월동) 추모 人波(인파) 2만여 명’ ‘女人(여인)·고교생 또 焚身(분신)’ ‘國立大(국립대) 교수協(협) 회장단 등 時局(시국)선언’.

 거리에는 최루탄 가스와 돌멩이가 어지럽게 뒤섞이던 군사정권 시대다. 91년 대학에 들어간, 그러니까 나와 학번이 같은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극단적 선택으로 폭력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궁지에 몰린 정권에 정국 반전의 호기가 된 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91년 5월 8일 분신 자살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동료인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살았던 강기훈씨가 지난 14일 대법원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았다.

 당시 강씨 변호인단에 포함됐던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24년 전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무조건 진술 거부권만 행사하란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의 가혹한 수사에 못 이겨 며칠 뒤 허위자백했다는 말을 듣고 허탈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은 풀렸지만 이미 24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스물일곱의 청년이었던 강씨는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초로의 중년이 돼 있다. 군부정권의 폭압에 송두리째 뒤틀려버린 강씨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모진 시간을 견뎌야 했던 강씨가 지난해 2월 항소심 승소 판결 이후 JTBC ‘뉴스룸’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지금 돌아보자면 어떤 ‘순간’이었다기보다는 ‘세월’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사건 당시 검사나 재판부에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좀 미안하다고 한마디 정도 해주면 안 되나, 그런 바람은 늘 있다”고 했다.

 그런데 91년 당시 수사팀에 참여했던 이가 며칠 전 언론 인터뷰에서 내놓은 말은 귀를 의심케 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판결도 지금 잣대로 하면 결론이 달라지는 게 많을 것”이라고 했다. 수사팀의 다른 이는 “당시 1, 2, 3심이 진행됐는데, 그 과정에서 진상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오히려 법원에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욕의 과거사 물줄기를 바로잡지 못한 사람들의 궤변으로 들린다.

 사건의 실체가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검찰과 사법부의 반성과 사과는 아직 없다. 24년간 진실은 왜곡됐고 정의는 지연됐지만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게 더 서글프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엄혹한 ‘1991년’을 직접 겪었던 세대로선…. 그저 “미안하다” 한마디가 그리 어려운가.

김형구 JTBC 정치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