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보복적 판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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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산 컬러TV에 대한 미국 상무성의 덤핑마진 재심판정은 한마디로 보복적인 인상이 짙다.
우선 미국은 눈앞에 닥친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조치에 비중을 둔 것 같고, 그 근거로는 우리 TV업계의 객관적 자료제시를 고의적으로 외면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난2월의 최종판정 때 미상무성은 국내 가전3사의 평균 덤핑마진율을 14·64%로 판정한 바 있다. 당시 국내 업계와 정부는 이같은 판정이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자료에 근거한 터무니없는 판정임을 들어 조속한 재심을 요청한바 있었다.
이번의 재심 예비판정은 그 동안의 줄기찬 조기재심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번의 예비판정이 충격적인 것은 덤핑마진율이 지난2월의 최종판정에 비해 최고 3배 이상 높아진 점이다. 이처럼 엄청난 고율의 덤핑마진율이 어떤 경위와 어떤 근거에서 조사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기업회계의 상식에서 볼때 30∼50%의 덤핑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난2월의 14·64% 판정때도 국내업계와 정부가 어이없는 고율 판정을 누누이 지적하고 관민이 총력을 기울여 재심을 요청했는데 그 재심판정이 오히려 원판정의 3배로 높아진 점은 아무리 순리로 따져도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특정 TV사에 대해 52·50%의 마진율을 적용한 것은 지난2월 미상무성 판정이후 특히 수출량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제품에 대해 고의적인 보복을 한 인상이다.
한층 실망적인 것은 한국측의 끈질긴 재심요구가 원판정의 부당성을 근거로 하고 있음에 비추어 미국측은 최소한의 성의와 우호국에 대한 「페이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재심의 수락은 그런 기대의 충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측은 지난봄 사상 최대규모의 대미 구매사절단을 파견, 20억달러가 넘는 주요물자를 구매했고 관민간의 접촉과 양국 통상장관회담에서도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조기 재심과 재심과정에서의 호의적인 협조를 약속한바 있었다.
그간의 이같은 사정을 두고 놀 때 이번의 상무성판정은 국내업계에 대해 실망을 지나 배신감조차 안겨주고 있다.
이번 판정은 이같은 충격과 실망 외에도 매우 납득되기 어려운 여러 측면이 엿보인다.
우선 지난여름의 이른바 현지조사과정을 포함하여 한국측이 제시한 방대한 물량의 각급 조사자료와 참고자료들이 거의 무시되거나 채택되지 않았고 어느 한 부분도 성의있게 검토·분석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측이 제시한 원가계산상의 여러 미묘한 관행의 차이나 광고비·금융비용의 계산, 모델설계나 판매비용의 처리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한 건도 성실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지난2월에는 인정되었던 부분까지도 조사기간 부족이나 자료불충분을 이유로 재심에서 제외시켰다.
이같은 미국측의 불성실하고 독단적인 자세는 호혜를 기본 줄기로 삼고 있는 국제무역의 상대로서 결코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물론 우리측이 그들의 행정절차와 관행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그것도 너무 조급히 서두른 감이 없지 않다. 또 그들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미묘한 대내적 압력을 받고있는 점도 이해할 수 있으나 세계무역의 안정된 질서가 그들의 국내 사정에 따라 원칙없이 흔들리는 것은 결코 미국의 이전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이성과 성의가 회복되어 최종 재심판결에서 온당하고 납득될만한 합의점이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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