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김정학(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한국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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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 국가원수가 일본을 공식 방문하였다는 것은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그것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더우기 궁중에서 전두환대통령을 위하여 베풀어진 일본 「히로히또」 천황의 만찬사에서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인국인이 도내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 학문·문화·기술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읍니다』 라고 말한것은 놀라운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수없다.
이때까지 일본의 역사학계도 이러한 고대에 있어서의 한국인및한국문화가 일본에 끼친 절대한 공헌을 될수록 은폐하려고 하거나 왜곡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부득이 그러한 한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말하게 될 때에는 대개 「대륙」 으로부터 그러한 문화가 전래되었다는 표현을 썼던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국가의 상징인 천황의 입으로부터 『6,7세기에 다수의 한국인이 건너와서 학문·문화·기술등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솔직이 표명하였다는것은 앞으로 일본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정신적 자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것으로 생각된다.

<4세기 한학가르쳐>
또 「나까소네」 수상도 9월7일의오찬사에서 『대통령각하, 일한 두민족의 교류의 역사는 아마도 수천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 대부분의 기간을 통하여 한국은 스승이었고, 우리는 그 제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일본이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한국에서 건너온선인들이 전해온 문화와 기술이 기여한 역할이 그 얼마나 컸던가에대하여는 새삼 말씀드릴 나위도 없읍니다』 라고 좀더 솔직하고 대담한 발언을 한것은 일본 국민들의 의식구조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것으로 생각된다.
「나까소네」 수상이 위와같이 『일한 두 민족의 교류의 역사는 아마도 수천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고 한것은 거의 정확한 역사지식에 의한 말이라고 하겠다.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방으로부터 대량으로 집단을 이루어 일본열도에 건너가 농경문화등 새로운 문화를 전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의 야요이시데(미사시대)부터이며, 그 뒤 단연적으로 한반도로 부터의 민족이동이 있어 일본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일황이 언급한 6,7세기에 있어서의 한국, 즉 백제인 및 백제문화의 일본에의 영향에 대해서만 살펴봐도 그 실상을 알수있다.
백제가 일본과 처음으로 국교를 맺은것은 4세기 후엽 백제의 근초고왕때의 일이다.
그 뒤 유명한왕인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한자와한학을 가르친것이 기원405년의일로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연대에 대하여는 『일본서기』의 기년으로는 285년으로 되어있어 차오가 있다.
이해는 백제의 아신왕이 돌아간해여서 이 무렵의 『일본서기』 의 기년은 우지 일주갑, 즉 1백20년을 내려야 된다.
백제가 일본 문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것은 불교및 불교문화를 전한 일일 것이다.
기원538년 백제의 성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불상과 경논을 전한것이다.
이에따라 백제로부터는 유명한 승려들, 불상을 만드는 조불사, 절을짓는 조사공, 와공·노반공들이 잇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595년에는 유명한 법흥사(비조사)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축성되었다.
물론 백제의 조불사들에 의하여 눈부신 거대한 금동불상도 만들어져 안치되었다.

<장엄한 가남 세워져>
불교는 놀라울정도로 홍성하여 짧은 시일안에 일본전국에 퍼지고, 장엄한 가남이 곳곳에 세워졌으며, 따라서 불상이며 탑파가 영조되었다.
또 불교 못지않게 일본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것은 유교의 전파다.
앞에서 말한 왕인박사외에 백제 무령왕 13년(기원513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를 보내 유교를 가르치고 그 뒤 대개 3년마다 교대로 오경박사를 파견하였다.
이밖에 백제로부터는 계속하여 의박사·역박사·역박사·화사·채약사·악인·조원사·직물공·재봉공등 학자 기술자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다헤아릴수 없는 것이다.
특히 기원660년에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된 뒤에는 왕족을 비롯하여 많은 교양있는 상층계급의 사람들이 일본에 망명하여 그들이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은 다 말할수 없다.
그들의 사적은 극히 일부만이 일본 문헌에 기록되어 알러져 있을 뿐이다.
그 중에는 대화국가의 정권을 손아귀에 쥐고 위세를 떨친 사람들도 있으며, 고대의 지식계급은 대개가 백제로부터 건너간사람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
예컨대, 7, 8세기에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에 유학간 학생이나 승려는 거의가 한국계의 후예들이었다.
또 문서나 기록을 맡은 벼슬을「후히도」 (사·사인)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대개 백제계 사람들로서 대대로 세농하였다.
그들은 대화 (나량) 지방에 산 「후인호」의씨족은동문씨(야마도노·후미우지)또는 왜한서씨(야마도노·아야노·후미우지)라고 부르고, 지금의 나양시고시군에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몇해전에 유명한 한국계인물 벽화가 그려진 고송총이란 무덤이 발견된 곳이다.
하내 (대판) 지방에 살던「우히도」 의 씨족들은 서문씨(가와찌노·후미우지) 또는 하내서씨(가와찌노·후미우지)라고 하여 지금의 대판부우예야시고시에 본거를 두어 살았다.
백제사람들은 특히 지금의 대판지방에 많이 살았다.
그것은 그때까지 이지역이 미개척지여서 관개기술의 경험이 있는 백제인들이 더넓은 평야의 하천에 둑을 쌓고 또는 저수지를 만들어 기름진 옥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판지역에는 「백제사」 니, 「백제교」니하는 백제라는 이름이 붙은 유적이 많은것은 그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왕인묘를 비롯하여 백제인들의 유적이 많이 파괴 또는 인멸되었다고 그것은 근세에 와서 한국이 근대화에 뒤떨어져 일본의 식민지가 됨에따라 한국계의 후손임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들의 출신을 될수록 숨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상층계급 중에는 한국계의 후예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문헌상에는 극히 일부만이 알려지고 있으나, 인류학적 또는 고고학적으로 많은 증거가 있다.

<지도층 한국계많아>
위에 말한 나랑과 대판외에 백제계의 망명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곳은 지금의 경도를 중심한 근강(오오미)지방과 동경도 이동의 동국(도오고꾸)지방이다.
근강지방에는 백제계의 진 (하따) 씨족이 가장 큰 세력을 쥐었다.
진씨족의 사찰인 광륭사 (봉강사) 에는저 유명한 반가사추미늑보살상이 있는바, 이것은 백제로부터 건너간 것이다.
진씨족과 이 반가상은 신라로부터 건너간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다.
동국지방은 지금의 동경도 (옛적무장야지방) 를 비롯하여 군마현자성현 (이바라기)·궁목 (도찌기)현·기옥 (사이따마) 현등이 속하여 있었는데, 그 지방으로부터는 잘알려진 복전 전수상과 지금의 「나까소네」수상들의 출신지방이다.
그들도 아마 한국계의 후손들일 것이다.
고대의 한일관계는 아직도 거의연구되어 있지못하다.
앞으로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올바른 사실이 밝혀져야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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