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보호 ‘액션파’ 청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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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호 31면

지난달 ‘바다에 잠든 아이들에게’를 시작으로 중앙SUNDAY에 연재를 하게 됐다. 한국 유력 언론을 통해 한국 팬들과 만날 수 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연결고리를 통해 언어상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 칼럼에는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하고 나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청룽(成龍·성룡)을 선택했다. 최근 청룽이 말레이시아 국가 원수로부터 명예 칭호를 부여받기도 해 이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그와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천추샤의 작품 ‘만강홍’ 앞에 선 청룽과 천추샤.

청룽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오빠뻘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대만 중영전영공사의 영화촬영장에서였다. 당시 나는 소설을 영화화한 ‘어느 여공의 이야기(一個女工的故事·1979)’ 촬영 중이었다. 그는 먼 곳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대형 세단에서 내렸다. 매우 늠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홍콩에서 온 두 명의 배우는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서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결혼 후 말레이시아에 정착한 뒤 그가 ‘폴리스 스토리(警察故事·1985)’ 촬영을 위해 쿠알라룸푸르를 찾았을 때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의 우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청룽은 여러모로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매우 진실하다. 결코 가진 것을 뽐내거나 으스대는 성격이 아니다. 다만 한번 옳다고 마음 먹은 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질주하는 스타일이다. 몇 년 전 친구들과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를 초대한 주최 측은 최고급 샥스핀 요리를 준비했다. 하지만 당시 청룽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 환경보호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터라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연회 내내 대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심지어 내 옆에서 사람이 상어를 얼마나 잔혹하게 죽이는지 직접 연기까지 선보였다. 결국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뛰어난 언변과 열정에 설득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문과(로맨스파)고 청룽은 무과(액션파)여서 영화 촬영을 같이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함께 음악 작업을 한 적은 있다. 2003년 철도회사인 중화건강쾌차(中華健康快車)가 마련한 자선행사에서 내가 만든 주제가 가향적용안수(家鄕的龍眼樹)를 발표한 것. 그는 알란 탐(譚詠麟·담영린)·장쉐여우(張學友·장학우)·류더화(劉德華·유덕화) 등 4대 거성과 함께 합창을 했다. 그 때까지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그 CD에는 1곡 밖에 수록돼 있지 않았지만 1달 동안 1000만 위안(약 18억원)의 기부금이 쌓였다. 백내장 환자 5000명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중화건강쾌차는 2005년엔 홍콩도서관에서 자선 서화전을 열었다. 나는 초청을 받아 행서(行書)로 송시를 적은 ‘만강홍(滿江紅)’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당시 청룽은 내 작품 앞에 서서 언론사 인터뷰를 진행했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며칠 뒤 청룽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오늘 아침 ‘만강홍’을 받았어. 누가 5만 홍콩 달러(약 700만원)를 주고 샀다던데 내가 좋아한다는 말을 듣곤 우리 집으로 보냈다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청룽은 내 작품을 소장한 첫 셀러브리티가 됐다.

청룽은 참 소박하다. 2004년 쓰나미 이재민을 위한 자선 합창대회에 참여했을 때였다. 그는 식사를 마친 뒤 그릇을 직접 정리하고 쓰레기를 비우더니 신문지로 바닥을 닦았다.

지난해 나는 57번째 생일을 맞아 자선 서화전을 열었다. 친구들에게는 생일선물 대신 기부를 부탁했다. 그렇게 생긴 기부금과 수익금을 모두 보육원으로 보냈다. 청룽이 마음먹은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처럼 나도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천추샤(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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