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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유서 대필 무죄 … 법원·검찰은 반성하고 사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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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씨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2부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됐던 강씨의 재심청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991년 5월 사건 발생 이후 24년 만에 나온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다. 이 사건은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간부였던 김기설씨의 투신 자살과 관련해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가 있다는 검찰 주장에서 비롯됐다. 강씨는 자살 방조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가 허위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강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강씨 사건은 과거 군부정권 시절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유서 대필 사건’이 아니라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당시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했던 검찰과 사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검찰은 상식적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고 결정적 증거도 없는 사건을 무리하게 기소한 것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국가 폭력과 사건 조작에 의한 개인의 희생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도 불린 이번 사건이 프랑스처럼 우리 사회에 진실과 정의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기 위해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검찰은 상황 논리와 조직 보호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인권 보호를 위한 수사 준칙 등에 대한 입장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사법부도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부당한 국가 권력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상황에서 진솔한 반성과 사죄가 없으면 판결의 효과는 반감될 수 있다. 정부도 자살방조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4년간 고통의 세월을 보낸 강씨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 중인 강씨는 지병을 앓고 있다. 국가 권력에 짓밟힌 강씨의 인생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