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바」와 카페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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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금은 서울의 군데군데에 모여 있는 환락가에 가보면 카페니, 바니하는 서양식 술집이 지붕을 맞대고 붙어 있지만, 30년대 전후로 말하면 이런 것이 없었고 앉인 술집, 선술집이 어쩌다 띄엄띄엄 한동네에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선술집은 대중적이니 만큼 그래도 수효가 많았고 대문간에다가 용수(술 거르는 싸리로 만든 통)를 거꾸로 매단 집이 꽤 많이 눈에 띄었지만 앉인 술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술집은 돈 5전을 내면 술한잔에 안주 한꼬치를 주니 서서 훌쩍 마시고 가기 편했다. 선술집이, 좀 커지면 주모가 술청가운데 좌정하고 앉아서 앞에다 물솥을 걸어놓고 그 솥 속에 양푼을 띄워 놓는다. 손님이 들어서면 옆에 놓인 술 항아리에서 술을 한국자 떠서 이 양푼에다 이리저리 서너번 휘휘 저어서 술잔에 따라준다. 이것이 술을 데워서 주는 것인데, 이것을 거냉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냉주를 싫어하고 반드시 데워서 마시기 때문이다. 안주는 주모 옆에 땅콩·오징어·북어같은 마른 안주가 널려있고, 이것이 싫으면 너비아니·체육·청어같은 것을 구워 먹을수 있다. 그것도 싫으면 술국이 좋다. 이렇게 술청에 서서 마시는 것이 선술집인데, 묵노 이용우, 청전 이상범, 정재 최우석, 심산 노수현같은 화가패와 백화 양건식, 횡보 염상섭, 춘해 방인근, 빙허 현진건같은 문사패들이 광화문에서 시작해 동대문까지 선술집 순례를 하고, 누구는 몇십잔을 마셨느니 하고 떠들고 자랑들을 하였다.
선술집보다 조금 지체가 높은 데가 앉인 술집이다. 서너사람이 방에 둘어가 앉아서 술상을 차려놓고 먹는 것인데, 첫번째는 손님이 몇이든 간에 한주전자에 80전, 다음부터는 40전이다. 순배라는 것은 돌아가면서 한잔씩 마시는 것인데 사람이 적으면 한주전자로 서너번은 돌수 있다.
안주는 굴이나 생선구이·제육 같은것을 늘어놓고 고추장찌개가 붙는다. 안주를 더 시키면 한접시에 얼마씩 돈을 더 내야하고, 이것을 서너주전자 마시면 얼큰해진다. 요리집에 갈수 없는 유명한 문사·화가·신문기자들이 대부분 이곳으로 몰려드는데 그때에 안주 잘한다는 앉인 술집이 많았다. 다방골 민순자네를 비롯해 오동나무집·부푼웃물집·날나리골집등등 많았는데, 지금은 그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신문기자들은 천하대세를 논하는 지사들이고, 문사·화가들은 고급 문화인으로 자처해 술좌석에서는 기염이 대단하지만, 기껏해야 앉인 술집밖에 출입할수 없는 빈털터리 들이었다.
그때는 일본의 식민지시대 이었으므로 모든 유행이 일본보다 6개월 내지 1년이 늦어 조선으로 들어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단체인 「카프」란 것도 일본의「나프」가 생긴지 1년뒤에 생겼고, 일본에서 이에 대항하는 십삼인구락부가 생긴지 2년 뒤에 구인회라는 순수문학단체가 생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대판에서 크게 번창하던 아까다마(적옥)라는 카페가 1년뒤에 당시의 본야이정목, 지금의 충무로2가에 경성지점을 냈다. 이것이 카페가 서울에 생긴 시작이었는데, 이 카페가 잘 되자 일본사람이 북촌에 눈독을 들여 서울 종로2가 우미관 옆에다 악원이라는 큰 카페를 냈다. 악원이 종로쪽에 생긴 카페의 시조인데, 처음에는 일본여급들만 있더니 곧 조선여급도 생기고 미녀들이 속속 여급으로 들어갔다. 「여급」이란 「여자급사」(웨이트리스)를 줄인 일본말이다.
악원카페가 생긴뒤로 우미관 일대는 서울의 새 환락가가 되었는데, 우미관이란 종로2가 골목속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오래된 영화관이다. 이 우미관에서 서양영화가 많이 상영되어 한때 관객을 많이 끌었다.
기생과 다른 신식 미녀들이 술시중을 드는 까페는 순식간에 인기를 끌어 젊은이들이 값싼 돈으로 놀수 있는 이리로 몰려들었다. 각처에 바·카페가 자꾸 생기고 전쟁전까지 이 새로운 유흥업소가 요리집과 기생을 누르고 날로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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