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1)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34)-당시의 기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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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음은 기생이야기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기생이란 말은 들었겠지만 기생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30년대에는 기생이 많았다.
기생이란 요리집에서 손님이 부르면 손님들 앞에 나가 노래하고 춤추고 술좌석에서 서비스하는 여자다. 그때는 바니, 카페니 하는것이 아직 생기지 않을 때라 남자들이 술마시고 여자와 어울려서, 놀려면 갈데가 요리집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녁때 친구끼리 요리집에 가서 요리상을 차려놓고 기생을 불러 춤추고 노래시키고 술을 따르게 해서 떠들고 노는 것이 술꾼의 즐거움이었다.
요리집에서는 기생을 어떻게 불러오는고 하니, 손님들이 요리집에 들어와 아무개 아무개를 불러달라고 하면 손님의 요구대로 그 기생이 속해있는 권번에 전화를 해 아무개 아무개를 보내달라고 한다.
권번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말인데 기생조합을 말하는 것이다. 기생들을 그 권번에 가입시켜놓고 수수료를 받고 기생을 요리집으로 보내주는 일종의 중개업자다. 그때 서을에는 다동에 조선권번·한성권번·대정권번하는 큰 권번이 셋 있었다. 이 권번마다 소속해 있는 기생이 각각 수십명씩 되어 이들을 방마다 요리집에 소개해주고 요리집에서 오는 화대속에서 일정한 액수를 떼어갖는 것이다.
화대라는 것은 기생이 손님한테 서비스하고 받는 보수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보통 1시간 서비스하고 1원50전씩 받았다. 그때 쌀1가마에 7,8원하였는데, 거기 비하면 싼것이 아니었고 한번 가면 서너시간 서비스하니까 한번에 5,6원의 벌이는 되었다. 그러나 어떤 돈잘쓰는 활량을 만난다든지, 그 기생한테 마음이 있는 남자를 만나면 그 기생한테 호의를 보이느라 화대를 특별히 많이 주니까 수입이 얼마가 되는지 알수 없다. 권번에는 물론 규정대로의 수수료만 내면 그만이니까 기생의 수입은 많아진다. 기생들도 일종의 노동자이어서 이렇게 벌어 부모와 형제를 멱여 살리고 공부시키는 갸륵한 여자도 많았다.
어째서 이런 기생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에는 봉건적인 구식결혼과 자유연애 결혼과의 과도기였기 때문이다. 부모의 명령으로 어려서 결혼한 남자들이 구식 여자에 대한 불만으로 이런 신식 여자와 접촉하기 위해 기생을 불러 노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기생과 애정이 생겨 가정에 파탄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고, 미혼청년이 기생한테 애정을 느껴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완고한 부모의 반대로 결혼을 할수없게 되자 정사를 하는 일도 생기고, 별별 일이 다 있었다.
그때 요리집으로 말하면, 서울의 명물인 명월관을 비롯해서 국일관·대서관·식도원·천향원등이 있었고, 중국요리집으로 아숙원·금곡원등이 유명했다. 외국사람, 특히 일본사람이 경성에 오면, 명월관에 들러 기생을 끼고 한번 놀아야 조선에 온 맛이 난다고들 하였다.
저녁때 어스레해서 전기불이 들어올 때 쯤되면 종로 큰길거리에는 곱게 화장을 한 기생들이 행렬을 지어 인력거를 타고 각처 요리집으로 향하는데, 이것도 서울거리의 한개 아름다운 풍물시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수 있다.
그러나 이 요리집과 기생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와 카페란 것이 차차 서울의 거리를 침식해 옴에 따라 한풀 꺾기게 되었다.
요리집은 들어가 방에 앉아서 요리상을 차려오게 하고, 기생을 불러오고 하는 거추장스런 수속과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카페나 바는 들어가 앉으면 「여급」이라는 미녀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고 이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유로 선택할수 있고 또 비용이 요리집에 비해 퍽 싸게 들므로 이 맛에 젊은 패들은 많이 카페와 바로 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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