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과 남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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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쯤해서 그당시 서울의 모습, 서울의 풍물이야기를 해볼까한다.
1930년 1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미쓰꼬시(삼월)백화점이 낙성, 개점하여 서울 사람이 새명물이 생겼다고 떠들썩했다. 5층으로 된 근대식 큰 백화점으로 일용백화가 없는 것이 없이 구비되어 북촌에 사는 조선사람들을 고객으로 많이 끌였다. 그때 북촌에는 백화점이 없었고, 화신백화점은 그로부터 훨씬뒤인 36년께 개점되었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것은 북촌과 남촌이다. 1905년 일본이 보호조약으로 한국을 묶어놓은 다음 초대 총감에 이등박문이 취임하여 남산 중턱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남산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일본사람의 거류지로 만들어 거기에 헌병사령부를 짓고, 조선은행을 짓고, 상업회의소를 만들고, 경성전기회사를 짓고, 백화점으로 삼월·정자옥·삼중정·평전등을 개점하게 해 저희들의 거류지를 번창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충무로 거리는 길폭이 좁았으므로 차마를 못다니게 해 보행자는 좌우편으로 마음대로 다니면서 물건을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거리를 본정통이라고 불러 서울의 메인스트리트 행세를 하게 하였다.
본정통 다음으로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정이라해서 일정목부터 육정목까지 있었는데, 경성운동장(지금의 서울운동장)은 황금정육정목에 있었다.
청계천은 넓은 개천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복개되어 흔적이 없어졌지만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아래 모교로부터 시작되어 종로 네거리의 광교, 더 내려와서 장교, 그리고 삼일빌eld 아래에 있는 수표교, 그 아래가 종로3가의 관수교, 화리껴다리, 효경다리, 배다리, 마전다리, 첫다리등을 거쳐 끝으로 오간수다리로해서 왕십리로 빠진다. 이 다리이름들은 지금 기억이 아리송해 틀린것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청계천이 서울의 남북을 갈라놓는 구획선 노릇을 하였다.
청계천 북쪽이 조선사람이 많이 사는 이른바 북촌이 되고, 그 남쪽이 일본사람이 많이 사는 남촌이 된것이다. 북촌의 중심은 종로고, 남촌의 중심은 본정인데, 해방전까지도 남촌과 북존의 차이는 완연하였다. 남촌에 들어서면 거리가 번화하고 활기에 차 있었지만, 북촌은 죽은듯이 고요하고 모든것이 잠자는듯 하였다.
내가 어려서 서울구경을 한다고 남산에 올라가 내려다 보면 북촌은 종로에 YMCA의 4층붉은 벽돌집이 하나 덩그렇게 서 있을뿐이고 나머지는 푸르뎅뎅한 기와지붕과 누런 초가지붕뿐이었는데, 남촌은 커다란 양옥집들이 수없이 우뚝우뚝 서 있어서 신시가지 같이 보였었다.
3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에는 큰 가게가 화신상회 뿐이었고, 그 아래로 금은방들이 늘어섰고, 화신상회 이외에 인사동 모퉁이에 있는 동아부인상회가 제일 큰 백화점 노릇을 하였다. 그밖에 대창양화점·한경선 양화점이 큰 구둣방이고, 김윤면 포목점이니, 구정상회 같은것이 큰 포목점이어서 이것들이 종로 상가를 꾸미고 있었다.
이렇게 북촌에는 가게도 많지않고 값도 비싸 젊은 인탤리 남녀나 부유한 가정부인들은 으례 쇼핑을 하려면 남촌으로 나갔다. 전차를 타고 왕복해도 전차값이 빠지고 물건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자옥·삼월·삼중정 같은데는 훌륭한 식당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값싸게 먹을수 있으므로 손님이 많이 몰렸다. 어떤때 이런 백화점이나 백화점 식당에 들러보면 손님은 대부분 조선사람이었다.
종로상가에서 자랑할것은 야시뿐이었다. 야시란것은 종로 화신상회 건너편에서부터 시작해 종로3가까지 이르는 큰길 왼쪽에다가 밖에 가게를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것이다. 포장으로 천막을 치고 땅에는 돗자리를 깔고 가스등불을 켜서 불을 밝힌 다음 돗자리에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것이다. 물건은 일용잡화로 우리네생활에 쓰이는 모든것이 다 있었다. 이것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손님을 부르는데, 여름밤에는 소풍겸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어떤 사람은 서울 여름밤의 풍물시라고도 불렀는데, 서울밤의 명물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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