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론의 실상|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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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70년대 중반『민중의 정의를 내려보자』며 모처럼의 학술모임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결국 학자들이 모이지 않아 무산됐던 이「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학계의 보수성을 반영한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대체적인 사정은 오늘날에도 엇비슷하다.
그러나「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자하는 학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은 점차 확산되고 있는 느낌이다. 민중이 현실적으로 역사의 주체며 당위적으로도 주체여야 한다는 시각에서 민중을 문제삼아 역사를 파악코자하는 일부 학자들의 열정은 역사에 부쩍 관심을 높인 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 학자들의 논의의 초점은, 일단 민중이 언제 존재했느냐는데 모아지고 있다. 민중은 역사의 일정한 시기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형성된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는 이들은 민중에는 이런 민중과 저런 민중이 있다며 한 단계 더 각성된 민중의 출현을 문제삼기 일쑤다. 이점에서「민중사학」의 민중론은 민중이 유사이래 항상 있어왔다는 일부 민속학자들의 견해나, 민중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일부 문학 비평가들의 견해와 달리한다.
정창렬교수(한양대)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에서 오늘날의 민중의식의 원형을 찾고 있다. 그것은 『농민층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인간해방과 민족으로의 결집을 이루려는 의식체계였다』는 것이다.
그는 3·1운동후 광범하게 전개된 노동자·농민운동을 거쳐 20년대 후반, 당시 과제의 해결을 담당할 민중의 확립을 보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방이후 새 조건속에서 민중의 재확립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만열교수(숙명녀대) 도 「미 해채된 봉건사회의 착취대상이자 식민침략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민중은 진주민난 이후 그 수가 불어나 식민침략 속에서 성장, 주도적 계층으로 발전해 20년대「민중」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강만길교수(고려대)는『중세사회와는 그 양상이 판연히 다른 조선조 후기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 중세적 개념인「백성」이란 말도 쓸 수 없고 특히 일제하에선「국민」이란 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며「민중」이외의 마땅한 말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편 조동일교수(정문연)는 피통치자가 스스로의 각성에 의해 통치질서의 개조를 요구해야 마땅하다는 새로운 「민」에 대한 생각은 허균-홍대용-정약정-최제우를 거쳐 신채호에의해 「중생」불교의「중생」과 관련, 평등을 요구하고 실현코자 하는 집단으로 인식되는데는 한용운에 의해, 결정적인 진전을 봐 신채호-한용운의 민중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자들에게 보이는「민중기피증」은 학계의 보수성외에 『학문적인 불필요성』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민중」이란 말이 갖는 강한 이데올로기성이 역사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준다는 것이다. 또「민중」에 관한 논의가 특히 활발함직한 근대사 연구가 아직도 관심의 강도에 비해 부진한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최근「민중연구」대한 역사학의 분발을 촉구하는 인접학문의 요구가 드세지고 있다. 「민중논의」에서 이제껏 소극적 태도를 보여온 역사학이 연구의 성과를 분배해 매개역할을 하지 않고는 민속학이나 사회학·경제학·신학·문학·음악·미술·연극·영화 등 여러 문화분야에서 펼치고 있는「이땅의 민중론」은 결국 실없이 따로 따로 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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