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3)극단 『아리랑 고개』-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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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즈음 일본인 무용가 석정모과 석정소낭의 일행이 거의 해마다 서울에 와서 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26년 봄에 왔을때에는 최승희가 석정의 문하생이되어서 그를 따라 동경으로 갔다. 그해 최승희는 숙명여고를 졸업했는데, 그때만해도 양가집 처녀가 벌거벗고 춤을 추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집에서 반대하고 법석이었다.
최승희의 오빠가 최승일이라는 소설가여서, 그가 부모를 설득하여 일본으로 보냈는데 최승희는 석정의 문하생이 되어 놀라울만큼 빠르게 무용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다음해인 27년에 귀국했을때는 최승희가 당당하게 일행의 공연에 참가하여 무용가로서의 재질이 널리 인정되었다. 이해에 조택원도 석정의 문하생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
28년에도 최승희는 석정을 따라 서울공연을 가졌는데 최승희의 춤이 선생보다 우수하다는 평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해인 29년에 최승희는 서울로 돌아와 혼자서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이단구·최상덕·정인익등 당시 신문사의 연예부기자들이 29년10월에 「찬영회」 란 것을 조직해서 연예부문의 활동을 진작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회의 첫번째 사업으로 신극단체 토월회의 침체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독력으로 무용연구소를 낸 최승희를 격려하기위해서 11월초에 조선극장에서 토월회의 대표인 박승희작 『아리랑고개』를 공연하고 최승희의 무용을 감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광주학생사건이 터지고 여러가지 뒤숭숭한 일을 의논하려고 동창들과 모였다가 조선극장으로 이 연극무용을 구경하러 갔었다.
신극 운동으로 유명했던 토월회의 재기공연이라고해서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메웠었다.
『아리랑고개』는 일본사람 고리대금업자한데 집과 땅을 뺏기고 북간도로 떠나가는 우리나라농민들의 참상을 주제로 한것인데, 갓을 쓰고 괴나리봇짐을 진 농민이 동네 사람들한테 조상의 산소를 부탁하면서 해마다 풀이나 깎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부터 관중이 훌쩍거리더니 마침내 당에 주저앉아 흙을 한줌움켜쥐고 『이 옥토를 버리고 가는곳이 어디냐』하고 울부짖자 일시에 극장전체가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진실로 비통한 장면이었는데 우리들도 모두 울고 극장을 나왔다.
내가 토월회의 공연을 본 것은 그때가 서너번째였다. 그래서 나는 같이 간 동창들한테 역시 토월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연극을 하고있다고 칭찬한 기억이 난다.
최승희의 공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무용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그저 황홀만 했지 이러니 저러니하고 비평할 능력이 없었다.
우리들은 술집으로 몰려가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방금 본 연극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이자리에서 나는 얼마전에 본 토월회아닌 다른단체의 인상 깊었던 연극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은 2년전인 대학예과 1학년때 본 『뺨맞는 그자식』이라는 번역극이었는데 연학년의 연출이었다.
연학년은 처응에 토월회에 참가하여 제2회공연때 『알테 하이델베르크』에서 보잘것 없는 단역으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27년에 따로 종합예술협회를 조직하고 천도교기념관에서 근대극강연회를 가졌는데, 거기서 아일랜드의 희곡 『월출』을 낭독하였다. 이어 11월엔 같은 장소에서 러시아의 작가 「안드레프」의 『뺨맞는 그자식』을 공연하였다.
허무주의적인 내용을 가진 이 연극은 당시로선 대단히 수준높은 연극이었다. 다행히 나는 첫날 들어갔기 때문에 연극을 재미있게 보았지만 사흘쨋날에 경찰은 이것을 중지시켜 이 연극은 더공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배우로서 인상깊기는 주인공 「뺨맞는 그자식」으로 나오는 강홍식의 그 당당한 풍채와 관록있는 연기였었다. 그는 현재 활약중인여배우 강효실의 아버지인데 아깝게도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못하고 일찍 죽었다.
아뭏든 연학년이 토월회를 누르고 일어서려던 야망은 이로써 꺾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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