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4)옥중집필|조용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광주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느냐는 것은 다음의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다.
김무삼이라고하면 서예가로 이름이 있었고 지금 나이먹은 서울사람들은 혹시 기억하고 있을는지 모르지만 키가 후리후리하고 기골이 장대한, 서울에서 유명한 열혈한이었다. 그는 그때 조선일보기자였고, 신간회회원이었다.
광주사건이 터지자 좌우익이 합체해서 민족통일단체롤 만들고있던 신간회에서는 사건의 진상을조사하기 위해서 조병옥을 현지에 파견했다. 그러나 송정리까지가서 경찰의 제지로 광주에 들어가지 못했고, 각 신문사의 특파원도 송정리에서 되돌아왔다.
이것을 듣고 분개한 김무삼은 조선일보사 기자인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며칠을 걸려 광주사건을 계기로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지어가지고 공장 사람을 구워 삶아서 수천장의 삐라를 만들었다.
김무삼은 혼자 이 삐라를 끼고 조선극장으로 갔다.
조선극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당시에는 북촌에서 단성사와 맞먹는 큰 극장이었다. 종로 아래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지금 예총이 있는 언저리에 있었는데 이극장에서 토월회가 『카추사』(부활)를 상영해 큰 성공을 이루고 우리나라에 신극운동의 횃불을 든 곳이다.
밤에 이 극장에 들어가 2층맨앞자리롤 차지한 김무삼은 기회를 엿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전깃불이 켜지자 이때다하고 아래좌석을 향해서 수천장의 삐라를 뿌렸다. 극장이 난장판이되고, 김무삼은 체포되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렇게해서 광주사건의 울분을 푼 김무삼은 해방후에 다시 나타나 서울신문사의 간부가 되어 활동하고 다니더니 다시소식이 없어졌다.
다음에 또 한가지 광주사건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로 홍벽초의옥중집필의 이야기가 있다.
홍벽초는 최남선·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3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 세사람은 20이채못되어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때 홍이 열아홉, 최가 열일곱, 이가 열다섯의 두살 터울이었다. 나이어린 이광수는 벽초의 지도를 받아서 벽초가 읽으란 책을 읽어갔는데 그당시 일본에서는 「톨스토이」 의 소설이 크게 유행하여 춘원은 벽초의 권고로 「톨스토이」의 소설을 탐독하게 되었다. 나중에 춘원이 쓴소설이 거의다 박애주의 사상을 밑바탕으로 한것은 이 까닭이었다고 벽초는 나한테 이야기한적이있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광주사건때문에 신간회에서 민중대회를 연다고하여 경찰에서 신간회간부들을 검거하였다. 그통에 벽초는 검거됐는데 그때 벽초는 조선일보에 장편연재소설 『임거정전』(임거정전)을 쓰고 있었다. 벽초는 그전해인 1928년 11월부터『임거정전』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중단되면 큰일이므로 신문사에서는 경찰한테 특별 교섭해 유치장에서 원고를 쓰도록 허가해줄것을 부탁하였다.
경찰에서는 원고를 쓰려면 책상이 필요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것 같아 처음에는 안된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필경 그청을 들어주어서 벽초는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서 유유히 소설원고를 써서 내보냈다. 신문사에서는 날마다 사동을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으로 보내 소설원고를 받아다가 신문에 실었다.
이것이 신문사에서도 편하였고, 필자 벽초에게도 편하였다. 그 까닭인즉 벽초는 집에 있으면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때문에 이들을 응대하다보연 원고가 늦어서 신문사의 심한 독촉을 받아야했다. 유치장속에서는 손님이 없으니 마음대로 원고를 쓸수 있으므로 제시간에 꼭꼭 원고를 댈수 있었다. 신문사측은 원고가 늦어 애태우는 일이 없이 제때에 원고가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옥중 집필을 이렇게 쌍방에서 환영하였다는 이야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