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7. 여자농구 쾌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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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자농구선수권 준우승의 주역인 박신자 선수(오른쪽)와 필자가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환영식 후 기념촬영을 했다.

1967년 5월 7일은 주말이었다. 서울 거리는 축제 전야 같은 흥분에 휩싸였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시절, 해마다 봄이면 창경원 밤벚꽃놀이가 상춘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서울은 창경원의 벚꽃을 무색하게 하는 우리의 곱고도 자랑스러운 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다. 멀리 공산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우리 대표팀이 개선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싱그러운 햇살이 서울 거리 위에 쉼없이 쏟아졌다. 나는 김포로 나가 선수단을 맞았다.

선수단은 대한항공편으로 귀국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환영행사가 열렸고, 카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오픈카에 나눠 탄 선수들은 김포가도를 달려 제2한강교를 지나면서 거리에 나와 있던 시민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에 묻혔다. 서소문 빌딩가를 지날 때는 오색 꽃종이가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명예회장을 맡은 환영대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3만 인파의 환호에 우리 선수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선수들에게는 국민훈장 석류장이 수여됐다.

대회는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프라하에서 열렸다. 참가국은 모두 12개국. 예선리그 B조의 한국은 이탈리아와 체코를 연파하고 조 1위로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결승리그에서는 동독.일본.소련.유고와 싸웠다. 동독과 일본은 쉽게 이겼지만 사실상 결승이었던 소련과의 경기에서 키와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은 50-83으로 졌다. 소련과의 여자농구 대결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한국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에 6연패를 당하다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러시아를 75-73으로 이겨 '대를 이은' 설욕을 해낸다.

한국은 22일 열린 유고와의 경기에서 78-71로 역전승, 마침내 소련에 이어 2위가 확정됐다. 한국의 에이스는 키 1m76㎝의 센터 박신자 선수였다. 대회 최우수선수(MVP) 겸 베스트 5에 뽑힌 그녀는 82년 신용보증기금 초대 감독을 맡아 한국 최초로 실업 농구팀의 여성 사령탑을 역임했다. 83년에는 여자 청소년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됐다. 88년부터 92년까지 여자농구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한마디로 여자농구의 대모 같은 존재였다. 그녀와 함께 세계를 주름잡은 선수는 김추자.김명자.김영임.주희봉.이소희.이영임.임순화.채현애.신항대.서경자 등이다.

세계대회 준우승의 의미는 컸다. 한국 스포츠가 단체종목에서, 그것도 신체조건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농구에서도 유럽팀과 겨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 자신감은 전통이 되어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 84년 LA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 등의 열매를 맺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여성 스포츠가 옛날에 강했듯이 앞으로도 강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여성 스포츠인들은 강인하면서도 총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체코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까지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대회 초청장은 마감일 일주일 뒤에 우리 농구협회에 도착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우리 팀을 'South Korea'로 부르겠다고 통보했다. 탁월한 국제감각과 행정 능력으로 이 문제를 풀어낸 분은 당시 체육회와 농구협회 이사를 겸하고 있던 조동재 선생이다.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농구연맹(FIBA)의 생리를 잘 아는 그는 FIBA 본부와 직접 대화하면서 'Korea'란 국호로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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