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9)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2)|잡기「삼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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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단종애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시나요? 모두들 하회가 궁금하다고 야단들인데··.』
고모는 이렇게 물었다. 그때 춘원은 동아일보에 역사소설『단종애사』를 연재중이었는데 병때문에 자주 쉬었고 이번에는 심장수술을 받느라고 5월부터 8월까지 거진 1백일동안이나 쉬였으므로 독자들이 궁금해서 법석들이었다. 그만큼 『단종애사』는 독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있다. 『독자들의 성화때문에 곧 시작은 해야겠는데, 자료도 정리가 채안되었고, 지금 큰 걱정입니다.』 춘원은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나를 바라 보면서
『글을 쓴다는게 이런 고역인 것을 조군은 아마 모를 게요.』하고 껄껄 웃었다.
이것이 내가 춘원과 처음 만난 장면이었는데, 자기는 원고를 새벽에 쓰고 낮에는 쉬니까 언제 와도 좋은데, 다만 건강때문에 오랫동안 상대를 할수 없으니 와서 오래 있지는 말아달라고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안방에서 허영숙여사가 나와서 큰고모한테 인사를 하였다.
『산삭(견삭) 이 언제시죠? 이달이나 내월이 아닙니까?』
고모가 허여사의 부른 배를 바라보면서 물으니까
『9윌인가 보아요』하고 대답하였다.
지금 연보를 따지면,그때가 3남 영근이가 출생할 때인듯 싶은데 초취 부인인 백여사가 남은 장남 보량은 이북에 있어서 생사불명이고, 영근이 위에 난 봉근이는 여덟살 때에 패혈증으로 죽었으니 영근이가 사실상 장남이 되는 셈이다. 영근이 아래로 딸둘, 정란과 정화가 있어서 허여사의 소생으로 3남매가 생존해 있다.
그뒤 얼마 있다가 신문에 작자의 신병 쾌차로 『단종애사』를 다시 연재한다는 사고가 났다. 나는 이튿날 춘원을 찾았다.
석양이 설핏한 건너방 책상앞에 춘원은 전보다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요새는 아침마다 경학원 뒤를 한바퀴 돌아온다고 하였다. 한시간쫌 걸리는데 처음 며칠은 피로하더니 이재는 괜찮다고 다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야기하였다.
내 집이 어디냐고 묻길래, 창덕궁 아래 돈의동이라고 하였더니
『그럼 파인의 집 근처로군…』
『파인?』
『김동환이라구, 요새 유명해진 시인이 있지 않소? 그 사람의 호가 파인이라우.』
『아. 요새 삼천리」란 잡지를 낸 사람말입니까?』
『그래요. 알구 있구료. 조군도「삼천리」를 샀소?』
『아녜요.신문에 광고가 났길래하는 말입니다.』
『그사람, 재주 퍽 있는 사람이야. 잡지도 편집을 곧 잘했고, 광고도 그럴듯하게 잘 냈던데-.』
『값도 십오전이니까 싸거든요. 잘 팔린다고 그러던데요.』
『그럴게요. 그사람 지독한게 무언고 하니 총독부에서 박람회선전 잘 해달라구 준 돈을 한푼도 안쓰고 그것으로 잡지를 낸거거든.』
이말을 설명한다면 총독부주최로 그해 9월에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성대하게 열게 되었는데, 신문에서 그 박람회선전을 잘 해달라고 총독부에 출입하는 각 신문기자에게 이른바 촌지라는 명목으로 2백원씩 나누어 주었다. 다른 기자들은 공돈이 생겼다고 친구들에게 술을 사주고 양복을 해입고 해서 다 없애버렸지만 김동환만은 그 돈을 한푼 안쓰고 고스란히 모아 잡지『삼천리』를 창간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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