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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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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 신사가 거지에게 100달러 지폐를 적선했다. 거지는 레스토랑에서 포도주 한 병과 함께 평생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한 뒤 웨이터에게 후한 팁을 줬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신사가 말했다.

"이제 모두 행복하군. 거지는 배불러 좋고 식당 주인은 음식을 많이 팔아 좋고 웨이터는 팁을 받아 좋고…. 나? 나야 위조지폐로 생색을 냈으니 좋고."

유머처럼 모두가 행복하면 좋겠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위조지폐 뒤에는 쓰라린 고통이 기다릴 뿐이다. 파나마는 미국 달러를 화폐로 사용한다. 공식통화 발보아(balboa)가 있긴 하지만 동전으로만 쓰인다. 덕분에 파나마는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가 겪고 있는 인플레를 독립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경제주권 대신 경제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게 부러웠던지 에콰도르도 2000년부터 자국 통화 수크레(sucre)를 폐지하고 달러를 기준 화폐로 삼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효과는커녕 인플레와 경제적 혼란만 가중됐다. 왜 차이가 나는 걸까. 이웃 콜롬비아에서 위조 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시장을 교란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과반수가 영어를 못하고 달러를 본 적이 없는 인디오인 에콰도르는 위조 달러의 천국이었다.

그래도 에콰도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히틀러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나치는 작센하우스 포로수용소에 '베른하르트'라는 유령회사 간판까지 내걸고 위조지폐를 찍어냈다. 화가.인쇄기사.은행가 출신 포로들이 총동원됐다. 전쟁 막판 위조 파운드는 전체 통화량의 50%에 달했다. 어찌나 정교한지 구별도 어려웠다. 영국인들이 지폐를 바늘로 찔러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안 나치는 위폐에 십여 군데씩 바늘 자국을 내기도 했다. 영국은행은 모든 지폐를 회수해야 했다.

히틀러가 달러에 손을 안 댔을 리 없다. 255번째 시도 끝에 완벽한 위조 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살포 직전, 소련의 참전으로 전쟁이 끝났다. 위조 달러까지 유통됐다면 전쟁이 더 길어졌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히틀러가 못한 일을 북한이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무부 관리들은 물론 주한 미 대사까지 연일 심상찮은 발언들을 쏟아놓는다. '수퍼노트(초정밀 100달러 위폐)'에 '메이드 인 북한(made in DPRK)'이라고 씌어 있진 않지만 아니라고 믿기에는 어딘가 석연찮다. 히틀러처럼 그런 행동이 최후의 발악이 아닌가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움찔 소름마저 돋는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