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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도 홀릴 만큼 우리 ‘옹녀’ 매력있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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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17면

옹녀가 파리에 나들이 간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이하 ‘옹녀’)가 ‘세계 공연 예술의 심장’이라 불리는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의 내년도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것(2016년 4월 14~17일 공연 예정). 테아트르 드 라 빌은 피터 브룩, 로버트 윌슨, 피나 바우쉬 등 거장들이 사랑한 150여 년 전통의 유서깊은 극장. 이곳의 연간 라인업이 곧 세계 공연계의 최신 트렌드가 된다. 각국에서 모여드는 관람객이 연간 40만 명에 이르는 이 ‘꿈의 무대’에 한국 단체가 정식으로 초청받긴 이번이 처음이다.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 안호상 국립극장장·고선웅 연출

‘옹녀’는 국립창극단의 일곱 바탕 복원사업의 하나로, 연출가 고선웅이 판소리 ‘변강쇠가’를 재창작한 작품. 오랜 기간 외설로 치부되어 소리가 소실된 ‘변강쇠가’가 고 연출의 손에서 재미진 대중 창극으로 변신했고, ‘색골 색녀의 음담패설’은 ‘인간미 넘치는 러브 로맨스’로 명예회복됐다. 지난해 초연시 창극 사상 최장기(26일) 공연에 6회 전석 매진·평균 객석점유율 90%를 기록했고, 현재 프랑스 투어를 위한 압축 버전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5월 23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꿈의 무대’에 선 ‘옹녀’가 과연 유럽 관객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까. ‘옹녀’를 제작한 안호상(56) 국립극장장과 고선웅(47) 연출가를 함께 만났다.

“고선웅이 변강쇠를 한다니, 이거 되겠다 싶었죠.”(안)

“이번에도 잘 될 겁니다. 냉정하게 지적해 주신 대로 잘랐더니 이제는 제가 봐도 구성이 너무 좋아요(웃음).”(고)

지난달 27일 오후. ‘옹녀’와 자신의 대표작인 연극 ‘푸르른날에’ 리허설이 겹쳐 눈코 뜰 새 없는 고선웅 연출과 우연찮게 두 작품 초연을 모두 제작한 안호상 극장장이 역시 바쁜 스케줄 속에 어렵사리 시간을 맞췄다. 냉철한 행정가와 천상 예술가의 조합은 일견 딴 세상 사람들처럼 묘하게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지만, 두 사람은 확신에 차 있었다. ‘옹녀’의 성공을 이끈 둘의 ‘찰떡궁합’에 대해서다.

테아트르 드 라 빌은 아무나 못 가는 곳이죠.
고: 말로만 들었어요. 피터 브룩 같은 분들이 명성을 쌓은 곳이라니, 정말 영광입니다.
안: 지난 연말 그쪽 예술감독 에마뉴엘 드마르씨 모타가 불쑥 찾아와 ‘작품만 좋으면 우리 창극을 초청하고 싶다’더군요. ‘옹녀’ 얘기를 꺼내니 동석했던 프랑스문화원 직원이 ‘아주 재밌게 봤다’며 강력하게 추천을 해요. 영상을 가져가 보더니 바로 연락이 왔어요. 규모를 좀 줄이는 조건으로 비용도 상당부분 부담해 초청하는 걸로 결정을 봤죠.

여러 작품 중에 ‘옹녀’를 민 이유는.
안: 한국적인 냄새가 강하니까요. 프랑스 관객이라면 한국적인 것을 선호할 거다 싶었죠. 프랑스에 판소리는 여러 번 소개가 됐지만 창극은 처음인데, 이왕 갈 거면 아주 한국적인 창극으로 가야죠. 프랑스 코미디와도 분위기가 비슷해서 외국인들이 보기만 하면 다들 좋아합니다. ‘공연만 하면 터진다’고 세게 밀었죠(웃음).

유머코드가 전달이 잘 되나봐요.
안: 판소리가 언어 유희의 백미인 것 같아요. 말의 묘미가 셰익스피어보다 뛰어나죠. 외국인들도 일단 말 맛이나 리듬감에 빠져들면 그런 우리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고: 각색하면서 저도 무릎만 쳤어요. 어쩜 이렇게 말 맛이 빼어난지. 제가 덧붙인 부분도 있지만 본질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잘 통할 겁니다.

‘옹녀’의 탄생은 국립극장 로비에서 시작됐다. 창극 ‘서편제’를 보러 온 고 연출에게 안 극장장이 “창극 한편 하셔야지?”라고 인사를 건넨 것. 기다렸다는 듯 “저도요?”라고 되묻는 반응에 감을 잡은 안 극장장은 김성녀 예술감독에게 곧바로 고씨를 추천했다.

“후보 중에 있었거든요. 초기에 실험은 해야겠고 리스크는 줄여야 되니 한태숙, 윤호진 같은 명망가들에게 기댔지만, 어차피 젊은 창극을 지향하니 젊은 감각의 연출가를 물색하는 와중에 ‘한번 툭 찔렀는데’ 반응이 오더라고요.”(안)
“원래 관심이 있었다”는 고씨는 반가운 제안에 바로 변강쇠를 떠올렸다. 국립창극단의 그간의 실험들과는 차별화를 택한 것이다. “정통 창극을 잘 해보고 싶었어요. 심플하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싶고, 도전하는 것 보다 원래 매력을 재발견하면 어떨까 했죠. 천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매력적인 스토리, 생명까지 승화되는 이야기로 변강쇠의 명예회복을 노린거죠.”(고)

창극의 역사를 새로 썼는데, 성공의 비결이라면.
고: 본능은 살아있다는 거죠. 본능과 해학이 창극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안: 고선웅은 연출 이전에 텍스트를 만드는 뛰어난 작가거든요. ‘옹녀’가 단편적 이야기만 남은 거라 창극에 맞게 재창작을 해야 하는데, 그라면 제대로 만들어낼 거 같았어요. 결과는 또 다른 파격이었죠.

창극사상 최초로 장기공연을 감행했는데.
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전속단체를 가진 장점은 장기 공연과 재공연이 자유롭다는 건데, 신작 만들어 서너 번 하고 관계자들만 와서 좋다고 하고 가면 뭐합니까, 진짜 관객이 못 보는데. 마침 달오름극장이 창극하기 좋은 극장이 됐고, 작품도 대중적이라 판단해 한번 도박을 해보자 한 거죠.
고: 저로선 부담이었어요. 그런데 하는 분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니 보는 분들도 좋아하겠구나 싶었죠. 이야기 자체가 선량하니까요.
안: 창극단의 실험에 젊은이들이 반응해 줬거든요. 그런데 옹녀는 젊은 관객 반응이 생각보다 덜해 첫 주엔 겁이 좀 났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중년층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시는 바람에 뒷심을 발휘할 수 있었죠.

외설 넘어 생명으로 승화된 스토리
옹녀 재창작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변강쇠가 죽은 뒤 줄초상이 나면서 지리멸렬하는 원전의 종반부가 문제였던 것. 고선웅은 역으로 화끈한 클라이맥스를 설정했다. 옹녀에게 ‘출생의 비밀’ 코드를 부여해 긴장감을 조성한 뒤 운명을 거스르는 강한 생명력을 발동하는 결말로 끝을 맺었다.
“어쨌든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가 돼야 된다고 봤어요. 가부장제 탓에 ‘변강쇠가’가 됐지만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여인의 이야기인데 그저 음담이라 치부하고 끝낼 게 아니라 본 거죠. 원전도 사실 사랑 이야기예요. 저는 단지 옹녀가 이야기를 열고 닫게 만든 거죠.”(고)

‘옹녀’가 차범석희곡상 뮤지컬부문을 수상했는데요.
안: 왜 창극은 연극상, 뮤지컬상 중 어디에도 후보가 안되냐고 주장했어요. 일단 후보에 올려달라고 했는데 뮤지컬계 반발을 우려해 심사과정이 지난했다죠. 워낙 작품이 우수하니까 한국적 뮤지컬로 인정받은 것 같아요.
고: 처음엔 ‘받아도 되나’ 했죠. 제가 받은 게 아니고 그간 창극이 해 온 많은 시도들에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안: 사실 작년에 ‘이게 진짜 창작 뮤지컬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창작 오페라나 뮤지컬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사실 우리 언어와 잘 안 맞거든요. 우리 말의 문법은 창극과 가장 잘 맞아요. 서양말과 우리말 어순이 다르니 흐름에 맞는 멜로디도 따로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은 2011년 처음 만났다. 연극 ‘푸르른날에’를 기획중이던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가 당시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지내던 안 극장장에게 남산예술센터 대관을 의뢰하자 아예 공동제작에 나선 것. 고선웅 연출을 추천한 것도 안 극장장이다. ‘푸르른날에’는 그해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연출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매년 재공연되며 ‘5월이면 꼭 봐야하는 연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칼로막베스’를 봤는데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어요. ‘아 재밌다. 유쾌하다’ 싶더군요. 원작을 완전 해체하고도 완성도를 유지하기가 어렵거든요. 고선웅을 한번 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있을거다, 뭔가 맥락이 있을 것 같다 싶었죠. 그래서 ‘푸르른날에’에 추천했는데, 이렇게도 나올 수 있구나 놀랐어요. 사실 희곡 자체는 논란이 있었는데 본인이 다시 쓰다시피 해서 새 작품을 만들어 냈더군요. 거의 충격이었죠.”(안)

“극장장님에겐 늘 어떤 아우라가 느껴져요. 부담 안 주시려고 가볍게 툭툭 던지셔도 바로 정리가 되죠. 반면 새로운 모습을 본 게 달오름극장 개관식 때였어요. 공연 시작 전에 무대에 올라 미주알고주알 사연을 얘기하시는데,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높은 사람들이 잔뜩 와 있는데도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모습에 정말 탱크같은 분이란 걸 깨달았죠.”(고)

한국 작품 최초로 테아트르 드 라 빌 입성
2012년 취임한 안 극장장은 국내 공연장 최초로 레퍼토리 시즌제를 전격 도입해 지난 3년간 수많은 신작을 쏟아내며 실험에 매진해 왔다. 세 번째 시즌도 마무리 단계에 이른 지금, 그가 가장 성공한 실험으로 꼽는 것이 창극 ‘장화홍련’이다.

“초기 전석 매진에 보조석까지 동원해야 했던 그 반응이 가장 강렬했어요. 창극을 컨템포러리로 바꾼다는 목표만 있던 그때 많은 걸 가져다 줬죠. 그 성공에 힘입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가장 자신있게 내놓는 작품은 ‘옹녀’입니다. 각색한 텍스트도 좋고 새로 만든 음악까지 완성도가 높아요. 제목부터 멋지지 않나요. 고선웅이 붙인건데, 제목부터 성공 못 시키면 안된다는 암시를 주잖아요. 우리가 그런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요.(웃음)”

국립극장은 지난 3년간 쌓은 재산으로 해외진출의 물꼬를 트고 있다. ‘옹녀’의 파리 입성 외에도 국립무용단의 ‘회오리’가 올해 칸 댄스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내년 샤이오 극장과 공동제작이 확정됐다. “세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게 안 극장장의 말이다.

“링컨센터 페스티벌 예술감독 말이 자기네 관객 20%가 한글을 알아본답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고유의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 요구에 부합해줘야죠. 일본의 부토·가부키 즐기는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갈증이 심해요. 한국의 고유 문화가 뭔지 궁금한 거죠. 그 책임이 국립극장에 있으니 답하러 가야죠. 유럽의 예술가들도 이제 아시아에서 영감을 구해요.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필요에 의해 나가는 투어를 해야죠.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한 일입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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