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3. ‘아시아 물개’ 조오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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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청와대에 초청돼 박정희 대통령(왼쪽)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

제6회 아시안게임. 우리가 반납한 개최권을 태국이 인수해 1966년에 이어 다시 한번 방콕에서 열린 대회였다. 70년 12월 9일에 시작돼 20일에 끝난 이 대회에는 18개국 2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한국은 12종목에 걸쳐 선수 131명, 임원 41명을 파견한다. 목표는 여유있는 종합 2위와 종합우승을 차지할 것이 분명한 일본과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목표를 이뤘다. 금 18, 은 13, 동 23개 등 54개의 메달을 따냈고 131명의 선수 가운데 108명이 입상하는 선전을 했다.

나는 방콕에 가는 대신 서울에서 승전보를 기다렸다. 나는 두 가지를 기대했다. 종합 2위와 육상.수영 등 기초종목에서의 메달 획득이 그것이었다. 4년 전 방콕 대회에서 힘겹게 종합 2위를 하면서 이들 종목에 대한 투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나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백옥자 선수의 육상 포환던지기 우승으로 보상받았다. 그리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의 수영 금메달은 4년 전 나의 다짐을 현실로 완성했다.

70년 12월 14일. 그날 나는 내 생애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한 희열을 맛봤다. 우리 체육계로서는 기념비적인 전환기를 맞은 날이기도 했다. 방콕에서 라디오로 중계하던 캐스터는 "이겼습니다, 이겼습니다"만 되뇔 뿐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수영은 아시아 최강 일본이 남녀부 금메달 싹쓸이를 장담했던 종목이었다. 그러나 혜성처럼 등장한 양정고등학교 2학년생 조오련 선수가 자유형 남자 400m 종목에서 우승해 일본의 꿈을 깨뜨렸다.

조 선수가 우승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체육회장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체육계 선후배들이 체육회관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들의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자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신문사의 벽보판 앞은 조오련 선수의 우승 기사를 읽으려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조오련 선수는 15일 1500m 결승에서도 우승해 2관왕이 된다. 전국은 일시에 '조오련 신드롬'에 빠졌다. 시민들은 어디서나 수영 얘기만 했다.

청와대도 가만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 선수의 부모에게 축전을 보냈다. 조 선수가 개선한 뒤에는 청와대로 그를 초청해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조오련 선수의 아시안게임 우승은 우리 수영 사상 처음이었고 운동선수가 훈장을 받기도 조 선수가 처음이었다.

백옥자.조오련 선수는 내가 신인발굴 사업을 통해 찾아낸 인재였다. 64년 도쿄올림픽에서 참패한 뒤 나는 재목을 발굴해 공들여 기르지 않고는 스타를 만들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나는 이렇게 발굴된 선수들을 내가 낳은 자식만큼 귀하게 여겼다. 두 선수의 금메달에 나의 가슴은 벅찼다. 조 선수는 나중에 자신이 아시안게임에서 딴 메달을 모두 액자에 넣어 내게 기증했다. 이 소중한 선물은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있는 나의 컬렉션에 전시됐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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