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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아시아 국가에 고통 줘" … 한 마디로 과거사 덮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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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9일 미국 워싱턴DC 하원 본회의장에서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상·하원 합동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과거사에 대한 사과의 뜻은 밝히지 않았다. 침략이란 단어도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도 담지 않았다. 뒷줄 왼쪽은 조 바이든 미 부통령, 오른쪽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 [워싱턴DC AP=뉴시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9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의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시도했다. “미국과 일본의 동맹을 강화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하면서다. 미 의원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아베 총리가 이날 선 미 하원 본회의장의 연단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뒤 그 다음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알렸던 자리다. 바로 이곳에서 아베 총리는 과거 적이었던 양국의 화해를 “역사의 기적”으로 부른 뒤 “미·일 동맹을 희망의 동맹으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이던 일본의 총리가 처음으로 합동연설에 선 것은 진주만 공습의 과거사를 완전히 해소하는 상징을 넘어 미국의 최측근 우방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신 미·일 동맹 시대의 출발점이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을 방문한 사실을 거론하며 “진주만(공습), 바탄·코레히도(죽음의 행진), 산호해(해전) 등 기념관에 새겨진 전투가 내 마음에 교차했고 (전사한) 미국 젊은이의 잃어버린 미래와 꿈을 생각했다”며 “깊은 뉘우침으로 얼마 동안 묵념 속에 그곳에 서 있었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또 태평양전쟁 때 일본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했던 미군 참전용사 로런스 스노든 전 중장을 거론하며 “방청석에 앉아 있는 그의 옆에는 이오지마 전투의 지휘관의 외손자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자민당 의원이 앉아 있다”며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던 적이 영혼으로 엮인 친구가 됐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전후 미국의 지원도 강조하며 미국 의원들을 파고들었다. 그는 “70년 전 일본은 잿더미였지만 미국 시민들이 매달 아이들을 위한 우유와 따뜻한 스웨터는 물론 2036마리의 염소까지 보내줬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전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도 강조했다. 57년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를 언급하며 “일본은 미국과 동맹의 길로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 왔다”며 미국을 지지해온 일본의 행보를 내세웠다. 아베 총리는 이어 ‘국제 협력의 원칙에 기반한 적극적인 평화 공헌’을 강조했다. 이는 미국 의회에서 박수로 공인받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시도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은 호주·인도와 전략적인 관계를 깊이 했다. 아세안 국가들과 한국과는 다방면에 걸쳐 협력을 깊게 해 가겠다”고 말했다. ‘호주·인도’를 한 묶음으로 우선하고 한국을 아세안과 한 조합으로 표현한 건 이달 초 일 외무성이 발표한 ‘외교청서’에서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나라’에서 한국을 빼고 호주·인도를 포함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이날 위안부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아시아 국가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려선 안 된다는 점에서 역대 총리와 전혀 변화한 게 없다”고 밝혔다. 한국·대만·아세안·중국 등의 발전을 언급한 뒤엔 “일본이 이들의 발전을 지원하는 데 자본과 기술을 쏟았다”고 강조했다. 위안부에 대한 사과 대신 “우리 시대에는 여성들이 인권 남용에서 벗어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미래 화법’을 구사했다.

 아베 총리의 이 같은 대응은 미·일 간 만들어진 밀월 관계에 기반한다. 전날 두 정상은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서로를 ‘신조’와 ‘버락’으로 부르며 80년대 서로를 ‘론’과 ‘야스’로 불렀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전례를 방불케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알링턴 국립묘지에 헌화한 것을 거론하며 “신조, 미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도 “버락, 종전 70주년을 맞는 해에 초대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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