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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시내에서 동전주차기가 사라진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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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5시, 조너선 딕슨이 영국 런던의 중심가인 세인트조지스트리트 노변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린 딕슨은 길가에 있던 표지판 같은 곳으로 가더니 휴대폰을 꺼내 조작하기 시작했다. “뭐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주차요금을 내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20일 영국 런던 중심가인 세인트조지스트리트 노변주차장에서 마크 필립스가 차를 댄 뒤 파크라이트 앱을 통해 요금을 결제하고 있다

그제서야 표지판 옆에 있던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주차단말기가 눈에 들어왔다. 딕슨은 스마트폰에서 ‘파크라이트’(parkright)라는 앱을 구동시킨 뒤 주차단말기에 기재돼 있는 고유번호를 입력해 자동으로 요금을 결제했다. 딕슨은 “파크라이트 앱 덕택에 동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져 주차요금 결제가 매우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이 앱은 서구 노변주차 요금결제의 상징적 존재였던 동전주차기를 런던 중심가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환락과 휴양의 섬으로 유명한 스페인 이비자섬의 우수아이아(ushuaia) 호텔에 들어서면 특이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카드 결제기처럼 보이는 이 물건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상용화된 지문인식기다. 고객은 이 기계에 지문 코드를 한번만 입력시켜 두면 그 다음부터는 체크인·체크아웃·룸서비스 등 모든 서비스를 지문인식만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스페인 투셰(Touche)사의 사바 생클레어 CEO는 “호텔 뿐 아니라 식당, 은행 등에서도 지문인식만으로 모든 결제가 가능하다”며 “카드나 현금, 신분증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투셰가 개발해 현재 스페인 이비자섬의 한 호텔에서 사용되고 있는 구형 지문인식기스페인 투셰사 관계자들이 곧 출시 예정인 신형 지문인식기의 이미지 앞에서 지문 및 카드 결제를 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활화산으로의 변신을 앞둔 휴화산 같았다. 핀테크가 금융개혁의 화두로 등장한 상황에서 유럽의 핀테크 현장을 지켜본 느낌이다. 아직 완전히 대중화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폭발적 수요가 뒤따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특히 이미 상용화된 몇 가지 기술들은 핀테크가 바꿀 미래의 모습을 미리 엿보게 해줬다.

영국은 대표적인 핀테크 선진국이다. 핀테크는 기존 금융인프라 제공업 등의 ‘전통 핀테크’와 신기술로 시장을 혁신시키는 ‘신생 핀테크’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주목하는 분야는 두말할 것 없이 신생 핀테크다.

이장균 여신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이 작성한 ‘영국지급결제 및 핀테크 산업의 이해’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2013년 기준 핀테크 분야 총수입은 200억 파운드이고 이 중 ‘신생 핀테크’의 비중이 18%에 이른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또 유럽의 핀테크 관련 신생 벤처기업(스타트업)의 절반이 영국 기업이다.

파크라이트 앱은 신생 핀테크 중에서도 국내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모바일 지급결제 시스템의 한 사례다. 이용자는 앱을 내려받은 뒤 자신의 계좌나 신용카드와 연동시켜 둔다.

이후 앱을 구동해 주차하기를 원하는 구역의 이름을 입력하면 인근의 주차구역들과 각 구역별 주차 가능대수가 실시간으로 확인된다. 여유 공간이 있는 주차 구역을 찾아 차를 댄 뒤 주차 단말기에 표시된 위치 번호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결제가 이뤄진다.

세인트조지스트리트의 주차단말기를 비롯해 런던 시내 중심가의 대부분의 노변 주차구역 단말기는 앱 또는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전통적 동전주차기는 이미 런던 시내 중심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상태다.

딕슨의 뒤를 이어 이 곳에 주차한 마크 필립스는 “동전주차기는 주차 시간을 연장하려면 일일이 단말기에 돌아와 동전을 집어넣어야 했는데, 이제는 주차시간 연장도 앱으로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페이팔 등 간편결제 시스템도 한국보다는 더 활성화돼 있었다. 런던의 초대형 쇼핑몰인 웨스트필드 쇼핑몰 주차장에서는 모바일 간편결제 시스템인 페이팔로 요금을 결제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페이팔 앱을 다운받은 뒤 단말기에 바코드를 인식시키면 되는 시스템이다. 식당에서도 카드단말기에 카드를 긋지 않고 모바일로 결제하는 젊은층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투셰가 개발해 현재 스페인 이비자섬의 한 호텔에서 사용되고 있는 구형 지문인식기

영국 핀테크 활성화의 배경에는 민·관의 대대적 지원이 깔려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스타트업들에 대한 장려책을 펴고 있다. 영국 정부는 창업기업 전문 대출기관인 비즈니스뱅크를 설립하고, 스타트업과 엔젤투자자들에 대한 감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 금융감독원(FCA)도 12명의 정예요원들을 뽑아 ‘프로젝트 이노베이트’라는 테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국내 핀테크 벤처기업들의 육성과 해외 기업들의 유치에 방해가 되는 규제들을 찾아내 개선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다.

민간 금융사들도 핀테크 스타트업들에 대한 지원에 팔을 걷고 나섰다. ‘레벨 39’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HSBC·바클레이 등 세계 굴지의 금융사들이 런던 원캐나다스퀘어 빌딩의 최고층인 39층을 젊은 벤처기업가들에게 낮은 수수료를 받고 통째로 내준 것을 말한다. 핀테크의 성공을 위해서는 금융가가 몰려 있는 곳에서 스타트업과 엔젤투자자들이 실시간으로 몸을 맞대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투셰 본사에서는 핀테크가 가져올 미래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2012년에 설립된 스타트업인 투셰는 지문인식 시스템의 상용화를 이뤄낸 드문 업체다. 시스템 개발자인 하비에르 페소는 “술값을 내려했다가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며 “그 때 ‘왜 꼭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지?’라는 문제의식이 생겨 지문인식 시스템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투셰의 시스템은 간단하면서도 확장성이 뛰어나다. 이용자가 최초에 지문과 함께 개인정보, 계좌 등을 입력시켜두면 시스템이 이를 기억한다. 그 다음부터는 손가락만 갖다대도 기계가 바로 인식해 결제 등이 가능하다. 특정 업소 한 곳 뿐 아니라 이 시스템을 도입한 업체들에는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식당에서도 단말기에 지문을 인식시키기만 하면 주문·계산·결제가 모두 가능하다. 은행의 경우 입구에서 지문 인식만 하면 고객 정보가 즉시 파악되기 때문에 보다 신속하고 심도 있는 서비스를 받게 된다.

업체 입장에서도 마케팅 등 작업이 한결 편리해진다. 예를 들어 10잔을 마시면 1잔을 공짜로 주는 커피 전문점의 경우 지금까지는 도장을 받은 종이나 회원카드를 인식해야 했지만 지문인식 시스템이 도입되면 이런 절차가 필요 없어진다. 기본적인 조건만 입력시켜 두면 지문 인식만으로도 혜택을 받게 될 고객인지 여부를 자동으로 알 수 있다.

보안 측면의 우려는 암호화·코드화로 해결했다는 게 투셰측의 설명이다. 처음에 손가락 2개의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데, 등록된 지문은 지문 이미지가 아니라 코드로 변형돼 보관된다. 상클레어 CEO는 “최초 입력시에 맥박 등의 신호도 모두 코드화해 함께 담기기 때문에 기계는 살아있는 손가락만 인식할 수 있다”며 “신체훼손 범행 등 끔찍한 상황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야심이 크다. 지급결제 시스템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류의 미래 생활상을 바꾸는데 일조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다. 회사명을 최근 단순한 지급결제의 의미가 강한 페이터치(Pay Touch)에서 투셰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투셰’는 ‘찌르기’를 뜻하는 팬싱 용어이자 좋은 의미에서 ‘찍혔다’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프랑스어다.

상클레이 CEO는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는 편리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고객이나 서비스 제공자가 모두 ‘나 좋은 일 당했어, 찍혔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겠다는 의미”라며 “‘당신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겠다’(Make your life easy)는 우리의 기업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장균 연구위원은 “한국도 핀테크 육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은 핀테크의 정의가 무엇인지도 명쾌하지 않은 상태”라며 “일부 영역만 좁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핀테크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런던·바르셀로나=박진석기자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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