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의"한국인순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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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달 로마교황「요한·바오로」2세가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은 여기 일본에서도 TV나 신문을 통해 비교적 자세히 보도됐다. 특히 5월6일에는 1백여만명의 신자들이 모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천주교 2백주년대회가 거행됐고 순교자 1백3명에 대한 시성식이 있었다고 전하고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시성식이 바티칸밖에서 거행된것은 가톨릭역사상 처음이라하며 한국은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 다음으로 세계에서 네번째의 성인탄생국이라한다. 한국천주교의세계적 위치를 가히 짐작할수있다.
나는 이런 보도를 보고 들었을때 여기 일본의 천주교역사속에 매몰된 또하나의 한국인 순교자들을 상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저 임진·정유왜난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끌려온 사실이 있다.그 중에는 저명한 학자도 있었고 도공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평민들이었다.
왜 일본 사무라이(무사)들은 한국인들을 납치했을까. 그들은 한국인들을 구주의 장기나 평호에서 포르투갈상인에게 팔고 그 댓가로 총이나 비단등을 샀다고한다. 말하자면 노예매매를 했단 말이다. 그 결과 어떤 책에 의하면 일본국내는 물론 마카오·마닐라·인도·코친 차이나(교지지나)등지에는 한국인 포로가 범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고통과 비참속에서 신에 귀의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자는 사람들이 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것이다.
일본의 천주교는 1549년에 스페인 선교사「샤비에르」가 남구주의 녹아도에 상륙하여 주로 서일본을 무대로 2년여에 걸쳐 포교한것이 시초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천주교도들을「기리시딴」(절지단)이라고 일컫고 있다.
덕천막부는 1612년부터 천주교를 엄금하고 신자에게는 개종을 강요했다.
그러나 적지않은 신자들이 이를 거부하여 투옥 혹은 순교하였고 겉으로만 개종하여서 십자가를 모시고 기도하는「숨은절지단」도 있었다. 이들 순교자중에 적지않은 한국인 신자들이 포함돼있다.
「파제스」의 『일본절지단종문사』에 보이는 한국인 순교자들의 모습을 몇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614년에 처형된「미가엘」은 장기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역시 포로가 되어서 일본에 끌려온 여동생을 돈으로 사서 자유를 되찾아주기위해 수년동안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구주의 도원반도 구지노쓰에서 체포됐다. 그의 다리는 잘리고 유해까지 난도질을 당했다.
1624년에 화형을 당한「가이오」는 경도천주교회에서『공교요리』를 듣고 교도가 됐다.
그는 부도사가 되어 포교사업에 종사하다가 1614년에 절지단대명(대명은 지방영주)으로 유명한 고산우근일행과 더불어 마닐라로 추방됐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박해가 비바람치는 일본으로 되돌아와 포교하다가 체포돼 장기에서 처형됐다. 형리들은 처형시간을 길게 끌어서 괴롭히기위해 장작불을 떨어진데서 피웠으나 그는 동요함이없이 태연하게 순교하였다고 기록돼있다.
마닐라로 추방된 고산우근일행에는「가이오」외에도「조선의귀족 마리아박」이란 여성이름도 보인다.
아마 당시의 일본순교사에서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오다·줄리아」일 것이다.
그녀는 임진왜난때 한국에 출진한 절지단대명 소서행장의 포로가 된 전쟁고아다. 소서는 그녀를 수양딸로 삼았다.
1600년 세끼가하라(관마원) 전투에서 풍신측에 가담한 그는 덕천군에 패배하여 참수당했다. 그후 그녀는 가강의 대오(궁녀에 비슷한것)에 들어가게 됐다.
가강은 부하를 시켜 그녀에게 개종하도록 강요했으나 일본천하를 좌지우지하던 그도 신앙에 대한 그녀의 불굴의 의지를 휘어잡지는 못했다. 상전의 명령을 끝끝내 거부한 그녀는 이두제도의 대도에 유배됐다가 나중에는 가장 남쪽의 절해고도 신진도에 유형당하여 거기서 생애를 마쳤다.
앞에서 본『일본절지단종문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예들중에서 가장 놀라운것은 부인들이다. 대오에 있던 천주교도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부인은「줄리아」「루시아」「쿠라라」였다. 그녀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으나 참으로 놀랄만큼 잘 견디었다. 그 필두는「줄리아」다.
그녀는 원래 조선사람이었으나 가강과 막부사람들로부터 존대를 받았으며 매우 인망이 있었다. 가강은 그녀의 고집에 화를내며「루시아」나「쿠라라」는 그만두더라도 모든 수단을다하여「줄리아」를 설득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녀는 장하게도 이에 저항하여 남쪽 이두의 대도에 유형됐다.>
일제시대에『조선순교사』를쓴 포천화삼낭이란 학자는 한국인순교자들의 과감한 순교정신에 경탄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원래 조선사람이란 것은 그리 용감한 민족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유약한 조선사람이 한번 신앙을 고집하고 주의에 목숨을 걸때 그야말로 침착·강담·용맹·장렬로써 칼을 밟고 수화를 박차며 만사를 맞받아 나아가는 열렬한 정신에 있어서 어느민족에게도 단연코 뒤떨어질것이 없다.>
일본 천주교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있는 한국인이 30명이나 되며 그중에서 유형·투옥·형육을 무릎쓰고 신앙을 고수한 사람이 25명인데 그 가운데서 21명이 모진 극형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1867년에 로마교황「비오」9세는 7윌2일자로 일본의순교자 2백5명을 시복하였는데 그중 9명의 복자가 한국인 순교자다. 나는 천주교에 대하여 별로아는것이 없다. 그러나 1801년의 신서교옥으로부터 비롯하는 장렬한 한국의 순교자와 그에 2백여년 앞서서 이곳 일본의 순교사가 보여주는 한국인순교자들의 순교정신에는 국경을 넘어서 어딘가 일맥상통하는것이 있게 보이는것은 나의 주관때문만은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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