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시·실험소설의 공간|김현 <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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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실험시·실험소설이라고 불리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험시나 실험소설은기존의 시나 소실의 형태를 파괴하는 시나 소설을 뜻하며, 전위문학의 하위개념을 구성한다. 실험시·실험소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고, 하고있는 시인·작가들은 이성복·황지우·이인성·최수철 등의 젊은 시인·작가들이다.
그들의 시와 소설이 기존의문학적 틀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하게 된 것은 기존의 틀로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자각 때문이다. 문학적 틀이란 현실을 파악하는 양식을 뜻한다. 세련된 양식은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이지만 동시에 세계의 새로운 모습에 놀란 새로운 예술가들에게는 마땅히 파괴되어야할 대상이다. 그것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애물이다. 그것은 세계를 주어진 틀에 맞춰 해석하고 분석하게 한다.
실험시가 파괴하고자하는 가장 강력한 문학적 틀은 근원정서에 기반을 둔 서정시다. 서정시는 즐거움·슬픔·고통·쓸쓸함·부끄러움 등의 근원정서를 표출하는 것을 목표하며 그 근원정서들은 누구에게나 편재해있으므로 폭넓은 공감대를 얻는다.
그 근원정서는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벗어난 추상적·초월적 정서다.
가령 김소월의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와 같은 시귀절에서 중요한 것은 떠나가는 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지 살아 움직이는 개인들의 구체적정황이 아니다.
실험시가 못견디어하는 것은 그 추상성이다. 실험시는 그 추상성과 그것에 바탕을 둔 보편성을 파괴하여 구체적 현실에 다다르려한다. 현실은 추상화되고 보편성을 띠고있는 투명한 의미체가 아니라 여러 의미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체적 정황이다. 그 얽힘을 풀지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 실험시의 목표다.
실험소설이 파괴하고자하는 문학적 틀은 이야기가 조리있게 진행되는 소설이다. 사실주의 소설이건 심리주의 소설이건 조리있게 아귀가 딱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은 실험소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짜 질서의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현실은 그토록 질서있는 공간이 아니며 아무리 그 의미를 해독하려해도 그 의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복합적 공간이다.
세계를 질서있게 묘사하는 것은 그 세계가 단일한 의미를 갖고있다는 믿음의 결과다.
세계가 과연 단일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세계가 갖고있다는 단일한 의미란 공식문화가 강요한 의미가 아닐까? 아니 차라리 이 세계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실험소설은 그러한 것을 묻고있다.
실험시와 실험소설은 기존의 문학적 틀을 파괴하려하기 때문에 그것은 대개 놀라움을 유발시킨다. 이런 시나 소설도 시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문학적 놀라움에서부터 이런 것은 없어져야한다라는 윤리적 분노에 이르기까지 그 놀라움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 놀라움은 편안하게 세계를 살아나가는 것을 방해 받은데서 생겨나는 놀라움이다. 익숙한 세계를 시나 소설 속에서 다시 발견하기 위해 시나 소설에 달려드는 독자들을 실험시나 실험소설은 창조적으로 배반한다.
여기 낯선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당신이 익히 아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아니 이 낯선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실험시나 실험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 실험시나 실험소설에 대한 가장 잔인한 복수는 그것이 파괴한 세계가 과연 파괴된 세계인가를 거꾸로 탐색하는 작업을 해보는 것이다. 나는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지만 않겠다. 당신도 내가 살고있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이 세계의 질서에 어느 정도는 매달려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독자는 무서운 독자다.
그는 놀람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실험시와 실험소설의 겉모습에 놀라 그것이 무엇을 해체하고 파괴하였는가, 왜 그런 작업을 했는가를 따져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가장 중요한 재미를 스스로 방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체된 작품에서 해체되기 전의 모습을 재구성해보는 것은 깨진 거울에 어떤 모습을 비춰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험시나 실험소설은 그 일그러진 모습이 현실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알맞는 예는 그 어떤 원론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갖고있다. 이인성의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라는 실험소설은 실험소설의 대표적인 예로 흔히 인용되고 있지만 그 속에 그려진 일그러진 세계의 모습을 복원한 독자는 아직 없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 팀의 주전 마라토너를 우승시키기 위해 초반에 전력 질주하여 다른 팀의 마라토너들의 힘의 분배를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맡고있는 마라톤 선수다. 실제시합에서의 그의 초반 질주와 주전 마라토너가 되지 못한데서 생겨나는 분노·고통·실의가 교묘하게 얽혀있는 그 소설을 자세히 읽으면 가난했던 소년시절의 삶, 마라톤선수가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려 한 소년시절의 꿈, 주전 마라톤선수가 되지 못한데서 생겨난 실의, 주전선수가 우승했다는 방송을 들을 때의 쓸쓸함, 극복하지 못한 가난 등의 공간이 맨 마지막의 닫힌 절 문 앞에서의 그의 모습과 겹쳐 이지러진 영상처럼 떠오른다.
그 공간은 한국작가들을 계속 괴롭혀온 고통스러운 가난의 공간이다. 그 익숙한 공간을 왜 내가 다시 똑같은 양식으로 소설로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그 가난의 공간을 해체하여 실험의 공간을 만든 작가의 근본적인 의문이다. 가난의 공간을 공식문화의 시선으로 극복해야되는 단계로 묘사할 것인가, 아니면 비공식문화의 시선으로 분노의 온상으로 묘사해야 할 것인가?
그 어떤 시선도 가난의 공간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을 막고있는 것이나 아닐까? 가난이란 무엇이며 그 공간은 사회의 전체적 공간속에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이인성의소설이 던지고있는 그런 질문들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질문들이다.
좋은 실험시·실험소설은 그런 질문들을 강하게 제시하는 작품들이다. 그것은 겉멋의 세계가 아니라 질문의 세계다. 이 세계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인가? 그 질문은 끔찍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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