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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이 만난 사람] '생활정치' 앞장 김관영 새정치련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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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영 의원은 “47세인 내가 우리 당 130명 의원 중 여섯 번째로 젊다. 정치권이 고령화돼 있다”며 “전체 의사를 균형 있게 반영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대 국회(2012년 6월 개원) 들어 가장 활발한 입법 활동을 한 의원으로 새정치민주연합 김관영(군산·초선) 의원이 꼽힌다. 지금까지 89건의 법안을 대표 발의해 24건(27%)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원 1인당 평균 대표 발의 건수(35건)와 평균 발의 통과율(15%)을 상회하는 수치다. 국회사무처 선정 ‘입법·정책 개발 우수의원’에 뽑힌 데 이어 최근 ‘중앙일보 생활정치지수(JPI·Joongang-ilbo Political Index)’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중앙일보가 한국정당학회와 공동으로 개발한 JPI에서 53.4를 기록, 주민 의견과 의원의 투표 성향에 높은 유사도를 보였다. 초선 4년차 의원이 보는 한국 정치의 민낯은 어떤 걸까. 지난 22일 의원회관을 찾았다. 그는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설득하니 새누리당 의원들도 당론과 다른 투표를 하는 걸 보고 굉장히 놀랐다. 아직 국회에 희망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우수의원 선정 비결은 뭔가.

 “특별한 비결은 없다. 다만 20년 직장생활을 통해 시간 계획을 세워 일하는 게 몸에 뱄고, 그러다 보니 성실하다는 얘기를 듣는 편이다. 앉으면 공부하고 신문 보면서 이슈가 뭔지 고민해 왔다. 4년 동안 100건을 대표 입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

 -4년 동안 100개 법안? 늘 그런 식의 목표를 정하나.

 “구체적이지 않은 목표를 세우는 건 안 세우는 거나 마찬가지란 걸 고시 공부할 때 체감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하면 안 하고 마는 경우가 많지만 매일 두 시간씩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한다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면 다른 걸 참고 하게 되더라. 또 목표는 실현 가능해야 한다. 4년간 100건이면 1년에 25건, 한 달에 2건이다. 그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89건을 대표 발의했는데 임기 말까지 110~120개는 하지 않을까.”

 -시중 여론과 민심을 어떻게 파악하나.

 “하루에 10명씩 리스트를 만들어 지인들과 통화를 하는데 안부도 전하고 시중 민심도 듣는다. 매주 토요일은 지역구 민원인의 날로 정해 하루 종일 사람들과 만난다. 지역에서 올라오는 지역 여론과 특이 상황 일일 보고로도 민심 흐름을 알 수 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 출신(87학번)인 김 의원은 고시 3관왕이다. 대학 2학년 때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행정고시를 패스해 경제기획원(기획재정부의 전신) 심사평가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재경부 공무원이 되려면 어떤 자질을 트레이닝 해야 할까”를 고민하다 독학으로 법을 공부했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진로(김앤장 변호사)가 바뀌었다. 10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정치인으로 변신, ‘제2의 공직 인생’을 살고 있다.

 -막상 정치를 해보니 어떤가.

 “여야가 맨날 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 열에 아홉은 타협을 통해 통과된다. 문제는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도열해 한판 붙다 보니 갈등구조가 심각해진다. 결과에 따라 권력이 100대 0이 돼버리니….”

 -진영논리가 정치 실패를 불렀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 지지세력이란 이유로 이익집단에 휘둘려 국회의 독자적 역할과 고유한 판단 기능이 흐릿해지는 게 많았다. 이익집단이나 이해 관계자들의 얘기를 듣고 참고할 수는 있지만 마지막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건 국회다. 한쪽의 얘기만 들어선 안 되고, 반대쪽 얘기도 들어보고 균형적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

 -실제 경험이 있나.

 “1호 법안으로 공기업들이 정원의 3%를 3년간 한시적으로 청년을 뽑도록 하는 내용의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냈다. 그런데 법안이 통과된 뒤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시행령에는 아직 청년의 연령이 만 15~29세로 규정돼 있었기에 공기업에 취직하려는 30~40세 사람들이 ‘김관영이 때문에 시험도 못 보게 됐다’고 들고 일어났다. 3000여 개 댓글이 인신공격과 욕설로 도배가 됐다. 청년을 대표한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한 건데 결과적으로 역차별당하는 사람이 나온 거다. 반대쪽 의견을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는 큰 교훈을 그때 얻었다.”

 지난 연말 그는 ‘사고’를 쳐 유명세를 탔다. 여야 합의로 본회의에 올라온 기업상속확대 특별법 개정안을 5분간의 반대 토론으로 부결시킨 것이다. 일본의 기코만 간장, 영국의 버버리같이 천년 가는 명문 기업 육성을 위해 가업 상속 시 상속제를 면세해 주는 게 이 법의 골자다. 예산 부수법안이어서 새누리당의 ‘찬성 당론’이 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상속세 제도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그의 반대 토론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강창희 전 국회의장. 이한구 전 원내대표 등 중진을 포함해 새누리당 의원 40여 명이 반대표를 던지며 이탈하는 바람에 법안이 부결됐다.

 -왜 반대했나.

 “2007년 가업 상속 공제제도가 생긴 이래 한 해도 안 빼고 매년 대상 기업을 늘리고 공제금액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돼 왔다. 2007년 1억원이던 공제 금액이 7년 만에 500억원으로 늘어났는데 이걸 1년 만에 또 1000억원으로 올리고, 매출 3000억원 이상에서 5000억원 이상으로 공제 금액을 늘리는 거였다. 기업하는 사람한테 지나친 혜택을 주는 것이고 정상적으로 상속세를 내는 사람과 평형성도 안 맞는다.”

 -부결을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연설 준비는 열심히 했다. 여당을 설득하려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싫어하는 부자 감세, 부자 증세, 재벌 같은 용어는 쓰면 안 되겠다 싶어 모두 뺐다. 스톱워치를 켜놓고 원고를 30여 번 읽어 4분45초 분량으로 맞췄다. 알기 쉽게 하려고 4장의 PPT 자료 화면도 준비했는데 반대 토론 때 PPT를 쓴 전례가 없다고 해서 따로 국회의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소회는.

 “새누리당 사람들한테 신뢰가 생겼다. 진영이 달라도 합리적인 토론을 하고 설득하니 반대표를 던지는구나, 제가 굉장히 놀랐다. 국회에 희망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의원들이 자유스럽게 투표하도록 놔두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 대변인,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고 문재인 대표 체제에서 조직부총장에 임명됐다.

 “김한길 대표님과는 일면식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참모들이 의원들 관계가 모나지 않고 독선적이지 않으며, 고시 3개 합격해서 기본적으로 머리는 있는 것 같다고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 대표의 위치에서 같이 고민하는 경험을 통해 많은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조직부총장은 총선을 준비하는 자리인데.

 “246개 지역구 당무 감사와 출마자를 2~3배수로 압축하는 데 실무 작업을 해야 해 어깨가 무겁다.”

 -스스로에게 몇 점을 주겠나.

 “80점은 주고 싶다. 그 이상 하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했다. 아들만 셋(고 3, 중 3, 초등 6)인데 롱런하려면 이젠 가족들을 돌보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은.

 “좀 더 도약해서 멋진 대한민국으로 가야 하는데 정치가 걸림돌이 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런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는 사람, 선진국으로 가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좁게는 새만금사업이 동북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과 고민이 많다.”

 -새정치연합이 ‘이걸 고치지 못하면 집권 못 한다’ 싶은 건 뭔가.

 “의사결정을 할 때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집권당이라도 이렇게 할 건가 하는 고민을 한 번씩 더 해봤으면 좋겠다. 우리하고는 좀 안 맞지만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이라면 우리가 집권해도 가야 할 방향 아닌가.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또 지금은 잠시 잠복돼 있지만 나라 이익보다 계파 이익을 앞세우는 걸 극복하지 못하면 집권은 어렵다. 연(緣)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사람을 내세워 계파 간 경쟁을 하면 도움이 될 텐데 과거에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농부 아들로 고시 3관왕 … 별명은 칸트·때밀이

5번·칸트·고시·때밀이·큰형님·시골….

 김관영 의원을 특징짓는 주요 연관어들이다. 김 의원은 “농사짓는 아버지와 40년 채소장사를 한 어머니, 아들만 6형제인 집안의 5번(다섯 번째)인데 바로 위 형님이 월등히 공부를 잘해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고 유년 시절을 소개했다. 고시 3관왕으로 재경부 관료와 김앤장 변호사를 거친 국회의원이란 지금의 이력과 대비된다. ‘화려한 변신’에 영향을 끼친 인생의 멘토는 맏형 김병준씨다.

 “형님이 고교 진학을 위해 고1 때 전주로 갔는데 그때부터 10년 동안 동생 5명을 위해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써 동생들의 진로 지도를 해줬다. 내가 운 좋게 서울에 있는 대학(성대)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형님이 서울에 직장 을 잡으면서 아버지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방 두 칸짜리 형님 집에서 7년을 같이 살았는데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도록 해줬고, 양보하고 힘을 합치는 게 좋다는 걸 가르쳐 줬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칸트’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그의 회고. “대학 회계사 준비반에 들어갔는데 첫 모의고사에서 100점 만점에 4점을 맞았다. 충격이었다. 교수님이 답안지에 ‘오늘은 4점을 맞았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써준 게 위로가 됐다. 다음 시험에 과락인 27점을 맞았는데도 교수님이 ‘급격히 성적이 올랐다’며 장학금을 줬다. 거기에 필 받아서 열심히 해 회계사가 됐다. ‘촌놈도 하면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릴 적 친구들은 김 의원을 ‘때밀이’로 기억한다. 친구들에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살자는 취지로 “마음의 때를 벗기라”는 말을 자주해 친구들이 때밀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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