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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농사, 은행 농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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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은행을 대하는 정부 태도를 보자면 꼭 '자식 농사' 잘못 지었다고 한탄하는 '부모' 모습 같다. 모든 것을 다 걸고 애지중지 키워놨건만, 집안일은 나 몰라라 제 잇속만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 경제에서 금융은 집안의 자식과 흡사하다. 자식이라면 가족 공동체를 서로 돌볼 책임이 따르듯, 금융은 경제라는 유기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공공적 기능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부는 부모가 자식 대하듯 금융사를 보살피고, 자칫 잘못되면 공적 자금을 넣어 거둬들인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금융권의 여러 자식 중 장남 격인 은행을 유독 아꼈다. 공적 자금을 듬뿍 넣어 사업 밑천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돈벌이 될 일거리도 많이 줬다. 아우들(증권.보험 등)이 버텼지만, 이들의 고유 일거리였던 펀드와 보험 판매 업무를 장남에게도 떼줬다. 행여 국제적 사업가로 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외국인 신부와 결혼도 시켰다(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 평균 60% 상회).

그 장남이 외견상 잘 크긴 했다. 올 들어 9월까지 은행들이 벌어들인 순익이 10조원을 넘었다. 웬만한 은행이면 조 단위의 순익을 냈다. 덩치도 커져 자산 100조원을 넘은 은행이 4개나 나왔다. 이렇게 몸집이 커졌는데 하는 행동은 영 장남답지 않다.

은행들은 대기업.부동산담보 대출 등 편안한 영업에 치중하고 중소기업.서민 대상의 금융에선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하기야 인재 육성을 소홀히 해 담보 없는 고객들의 신용 위험을 가려낼 능력도 크게 떨어진다. 카드사태에서 보았듯이 돈이 좀 된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가 과당경쟁을 벌이다 큰 손해를 보기도 한다. 커진 덩치를 이용해 횡포까지 가끔 부린다. 외환위기 전 건당 몇 백원에 불과했던 은행 송금 수수료는 지금은 2000~3000원으로 올랐다. 은행이 펀드와 보험을 팔면 판매 수수료가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야말로 기대에 그쳤다.

정부는 은행들에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 벌어들인 돈을 두둑이 쌓아놓으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은행은 외국인 주주들의 뜻에 따라 한바탕 배당 잔치를 벌일 참이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부모는 잔뜩 화가 난 모양이다.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은행이) 경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했고,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은행의) 안전 지상주의가 기업가정신을 꺾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게 부모 된 자세는 아닌 듯싶다. 자식 잘못 키운 것부터 반성하고,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해야 할 일이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동생들을 이제라도 반듯이 키우는 것이다. 은행 편향적으로 만든 금융시장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 증권과 보험사들의 발목을 잡아온 규제들을 과감하게 풀어 은행의 대항마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은행에 집중된 자금 중개기능을 자본시장 쪽으로 분산시킬 정책이 필요하다. 은행에 독점된 업무들을 다른 금융권에도 점차 허용해야 한다. 그러면 은행도 정신을 확 차릴 것이다.

정부도 이런 의향을 최근 잇따라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엇비슷한 얘기를 꺼냈다가 흐지부지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은행들 스스로 공공적 기능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그게 미래에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은행들은 국민과 정부에 진 빚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김광기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