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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급 유흥장 트로피카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는 아바나시의 남서쪽 주택지인 알투라 드 벨렌구에 가면 쿠바인들이 자랑하는 트로피카나라는 야외 나이트클럽이 있다.
밤 9시부터 새벽 3시쫌까지 문을 여는 이 트로피카나는 수천평의 울창한 야자수와 열대림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도시한가운데에 떠있는 환상의 섬처럼 느껴진다.
파리의 세계적인 리도쇼를 무색케 하는 화려한 쇼가 벌어지고 현란한 조명아래 춤과 노래와 술이 어울려진다.
무대 위에서는 검고 횐 팔등신 무희들의 어깨와 엉덩이춤이 요동치고 쿠바의 전통음악인 라팔로마와 스페인 계통의 아바네라, 그리고 아프리카 계통의 룸바·볼레로 등의 활기찬 음악이 손님들을 사로잡는다.
공산국가인 쿠바에 이러한 화려한 나이트클럽이 매일 밤 성업중이니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트로피카나의 매니저인 「리카르도·비야누에바」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쿠바인들은 춤을 못 버립니다. 카바레는 춤의 센터이자 문화와 유산의 숨결이 스며있는 곳입니다』
20년 동안 문교성 관리로 재직하다 8개월 전 트로피카나 매니저에 취임한 「비야누에바」씨는 트로피카나 소개에 열을 올린다. 『트로피카나에 출연하는 3백명의 무희들과 음악인들은 모두 국립예술학교 출신들이지요. 월 보수는 2백 95달러에서 3백 50달러입니다. 일반 노동자들보다 약간 높은 편입니다. 여기에서는 외설적인 섹스가 없습니다. 오직 예술뿐이지요.』
트로피카나는 「비야누에바」씨 말대로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와는 조금 다른 곳이다.
쿠바정부가 동구에서 오는 귀빈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특별 민속무대이며 미국·프랑스·서독 등 서방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들로부터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설치한 고급유흥장이다.
쿠바정부가 트로피카나를 고급 「유흥장」으로 탈바꿈시키게 된 것은 70년대 말 이후 국제 설탕 값의 폭락으로 쿠바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부터다.
82년의 경우 쿠바 경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설탕의 국제가격이 80년에 비해 4분의 1로 폭락, 파운드당 7센트를 기록했다. 이 가격은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
쿠바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서서히 문호를 개방, 관광객 유치작전에 나섰다.
트로피카나를 고급유흥장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의 기호를 맞춰주는가 하면 고급호텔을 지어 서방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모든 택시의 미터기에는 쿠바의 페소화와 함께 달러화로 요금이 표시되도록 했고 공항과 호텔 안에는 서방의 모든 고급상품들을 진열, 달러화로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호텔과 공항 안에서만 통용되는 쿠바달러 동전을 특별히 주조해 통용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밖에서는 통용 안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비자카드 등 서방의 크레디트 카드가 호텔 안에서는 통용이 가능하도록 했고 국제전화가 호텔 안에서는 연결되도록 조치했다. 이번 여자농구 프리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 및 작년의 IPU 총회와 같은 국체기구회의의 유치에 열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쿠바를 방문하는 외국대표들의 통역과 관광안내를 맡고 있는 「펠리페·이술라」씨(27)의 솔직한 다음의 말은 이 같은 쿠바정부의 입장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달러가 필요합니다. 비록 자본주의국가의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쿠바정부의 정책에 따라 외국관광객들과 외국귀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급유흥장으로 탈바꿈한 트로피카나는 쿠바의 현대사와 함께 변천을 거듭했다.
40년대와 50년대에 트로피카나는 도박장이었다, 당시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었던 트로피카나에서는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가 왔다 갔다 했었다.
엄청난 돈이 움직이고 화려한 무대가 설치되니 매춘과 마약이 빠질 수가 없었다. 환락과 타락이 뒤엉켜 낮과 밤을 가리지 못하는 장소였었다.
그러다가 59년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트로피카나는 갑자기 재미없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무거운 혁명내용의 노래가 불려지고 정치적 메시지가 전달되는 장소로 변한 것이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쿠바경제가 어려움에 닥치자 트로피카나는 다시 밝음을 되찾고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달러를 벌기 위해 미국이나 프랑스의 어느 사교클럽에 뒤지지 않는 유흥장이 된 것이다.
매니저 「비야누에바」씨의 말대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자본주의적인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는 아바나시에는 일반 시민용의 사회주의적인 것과 외국관광객과 특권층용의 자본주의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글·사진=이규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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