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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엔 단호, 안보·경제는 협력 … '현실적 대일외교' 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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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베의 일본’을 상대하려면 우리가 바라는 일본이 아니라 현재의 일본을 전제로 한 현실적 대일외교가 필요하다. 집단적 자위권을 해금하고 미국과 군사적 일체화를 강화하는 일본의 ‘보통국가화’ 작업은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 역사 수정주의를 바탕으로 패전체제의 굴레를 벗겠다는 아베 정권의 노선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 사회에 보수우경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할 말은 하겠다는 공세적 외교자세가 뚜렷하다.

 하나같이 한국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런 일본을 상대로 대일외교를 꾸려나가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상대방과도 적절한 수준에서 협력을 유지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 수준인지 판단할 기준이 필요하다.

  중국의 급속한 대두로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크게 변하고 있다. 이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이익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조화롭고 안정된 지역질서가 형성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상위목표에 따라 일본과 무엇을 함께할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없는지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단순한 한·일 양자관계의 관리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까지 염두에 둔 입체적 발상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가 미·중 양국의 주도로 형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이 고민을 공유하고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협력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일본이 미·일 동맹 일변도 정책으로 ‘중국 대 미·일’의 대결구도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편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대응을 계속해야 한다.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는 결코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도 사안별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따질 것은 따지는 시시비비의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는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자세가 쉽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한국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아베 정권의 속 좁은 행태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의 하나다. 그러나 국가 간에는 반드시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이익을 공유하면 협력은 가능하다. 또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협력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관계는 ‘제한적 협력관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역사문제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안보나 경제 분야는 실용적 이익의 관점에서 제한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분리대응’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대안이다. 반둥회의에서 아베와 정상회담에 응한 중국도, 다음주 아베에게 상·하원 합동연설을 허락한 미국도 모두 분리대응의 외교를 하고 있다. 대일외교 역시 전통적 우호라는 관성과 감성적인 인식보다는 이해득실에 대한 차갑고 합리적인 계산이 중요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세영 전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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