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되찾은 연말 특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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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어드밴테스트에 근무하는 다카하시 겐이치(36) 계장은 요즘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조만간 받을 연말 보너스가 137만5700엔(약 1300만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37%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투자한 기업의 주가도 올 들어 55%나 올랐다. 회사에서 출퇴근 교통비조로 지원해 주는 돈도 최근 한 달에 10만엔에서 15만엔으로 뛰었다. 그는 "극심한 불황을 겪었던 지난 10년간 회사가 전 직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450명을 해고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저 살아남는 것이 지상 목표였다. 좋아하던 골프도 끊고 외식도 줄였다.

'잃어버린 10년'뒤끝에 마침내 '환희'가 찾아왔다. 회사 실적이 크게 향상되고 주머니도 두둑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각종 모임도 크게 늘어났다. 오쿠라.데이코쿠 등 도쿄 시내 유명 호텔들은 이미 연말까지 객실과 연회장 예약이 모두 끝난 상태다.

그래서 좀 분위기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려 해도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환희'를 맛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회사원들 사이에선 "요즘은 술을 마시고 싶어도 마실 데가 없어 못 마신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저녁시간에 예약 없이 웬만한 식당에 갔다간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도쿄 최대 택시회사인 그린캡의 택시기사 혼다 다로(57)는 "지난해 말에는 카사카.롯폰기.신주쿠 등 유흥가에서도 택시들이 수십m 줄지어 손님을 기다렸지만 올해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그는 행인들이 서로 택시를 잡으려고 차도로 뛰어드는 모습이 1980년대 후반 버블(거품 경제)을 연상시킬 정도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도쿄만이 아니다. 11일 오후 2시 오사카 중심가인 도톤보리. 재래시장과 백화점이 밀집해 있는 이곳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특별 세일'이 아닌데도 가게마다 고객들이 바글바글했다. 반찬가게 종업원 아라이 미키(63)는 "재래시장에 손님이 이렇게 몰리는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13일 838개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말 보너스는 지난해보다 평균 3.5% 늘어난 80만4458엔(약 800만원). 종합주가지수도 올 들어 40%나 올랐다. 2년 전부터 개선되기 시작한 기업 실적이 주가 상승과 종업원 소득 증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경기 회복을 확신할 수 없어 자중하겠다"며 월급 인상을 3년 연속 동결하려던 도요타자동차 노조도 내년엔 인상을 요구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그래서 일각에선 '제2의 버블'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10년 이상 아픔을 겪은 만큼 마구 허리띠를 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대도시와 대기업들이 흥청거리고 있는 것과 달리 지방 도시와 중소기업들은 아직도 가라앉은 분위기다. 수출업체나 덩치 큰 기업들의 온기가 아래로 전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말의 들썩거리는 풍경은 국지적인 현상일 뿐 다수는 아직도 경기 회복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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