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의 차이 나는 차이나] 시진핑 '중국꿈' 설계자 … 왕후닝의 힘 어디서 나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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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세상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세를 잘 봐야 한다. 지금은 세계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을 면밀하게 살펴야 할 때다. 여기서 남보다 한발 앞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의 부상을 이끄는 주요 인물을 잘 챙겨야 한다. 왕후닝(60)이 대표적인 예다. 장쩌민(江澤民) 시절 발탁돼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시진핑(習近平)에 이르기까지 삼대(三代)에 걸쳐 중국 문인(文人)의 꿈인 ‘제왕의 스승(帝師)’ 역할을 하고 있다. 그를 모르고선 중국의 가는 길을 읽을 수 없다.

 시진핑이 해외 출장을 나가거나 국내에서 관리를 만날 때 시진핑 뒤엔 늘 그가 있다. 굵은 안경테로도 감출 수 없는 큰 눈망울을 한 전형적인 서생(書生) 차림이다. 중국 권력 서열 25위 안에 드는 정치국 위원이지만 워낙 드러내지 않는 처신에다 그가 맡은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라는 자리가 직접적인 권력 행사와는 거리가 멀어 줄곧 은둔의 책사(策士)란 말을 들어 왔다.

 왕후닝이 중앙 무대에 등장한 건 1995년 가을이었다. 장쩌민의 당 대회 연설을 기초하며 ‘개혁과 발전, 안정’의 삼자 관계 처리에 대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면서다. 이어 장쩌민 시기의 지도 사상인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을 만들어 중국 공산당이 노동자·농민의 당에서 전체 인민을 위한 당으로 변신하는데 필요한 논리를 제공했다. 후진타오 시대엔 고속 성장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한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을 내놓았다. 시진핑 등장 이후엔 낙마할 것이란 예상을 일축하고 시진핑의 구호인 중국꿈(中國夢)을 디자인하고 있다.

 중국의 지난 20년이 왕후닝의 기획에 의해 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10년 역시 왕후닝이 그리는 대로 굴러갈 공산이 크다. 중국 공산당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할 것이란 왕후닝의 괴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느 한 편에 줄을 잘 서는 재주만으론 설명이 될 수 없다. 수십 년을 하루 같이 정진한 학문적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1955년 10월 상하이에서 태어난 왕후닝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문화대혁명(文革)이 발생하자 집에 틀어박혀 책만 봤다고 한다. 이때 평생을 좌우할 두 가지 좋은 습관을 길렀다. 하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을 키운 점이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논리적으로 분석한 뒤 이를 머리속에 조리 있게 정리해 넣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독서인(讀書人)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상하이사범대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뒤 78년 푸단(復旦)대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며 17년간의 푸단대 인생을 시작한다.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강사가 된 그에겐 세 가지 평가가 따랐다. ‘능력 있고(能干) 재치 있으며(有才華) 한눈에 열 줄씩 읽는다(一目十行)’. 남이 2~3일에 걸쳐 한 권 읽을 때 그는 하루에 세 권을 봤다. 하루는 “매일 책만 보는 게 재미있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는 “스님이 왜 매일 불경을 외는 줄 아냐”고 대꾸했다고 한다. ‘한 권의 살아있는 정치학 사전’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29세의 나이에 부교수로 승진한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88년부터 89년까지 미국 유학을 마친 뒤엔 미국정치체제를 비판한 『미국은 미국을 반대한다』는 책을 냈다. 그는 문회보(文匯報)나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 등 신문에도 정치개혁을 주제로 종종 기고했다. 그는 중국이 개혁에 올인하기 위해선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개명전제(開明專制)도 필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신권위주의 지지자라는 말을 듣게 된 배경이다.

 그런 그를 당시 장쩌민 상하이 당서기 아래에서 선전 부문을 맡고 있던 쩡칭훙(曾慶紅)이 주목했다. 두 사람은 중국이 당면한 정치개혁 문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는데 누가 학자이고 누가 관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이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된 장쩌민을 따라 베이징으로 올라온 쩡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후닝은 95년 중앙정책연구실에 발을 들여놓은 뒤 지금까지 20년 동안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중앙정책연구실은 당 중앙을 위해 정치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며 문건을 기초하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조용히 중국 지도부의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작업을 한다. 정치국 집단학습을 통해서다. 시진핑이 주재하는 집단학습엔 중국을 이끄는 최고위 관료 40~50명이 모인다. 이 집단학습의 주제와 강사 선정에 중앙정책연구실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어떤 문제를 어떤 강사를 불러, 어떤 결론으로 유도할 지가 왕후닝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런 왕을 미국 언론은 외교의 귀재 헨리 키신저와 국내 정치의 달인 칼 로브를 합쳐 놓은 인물과 같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 왕후닝 신상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이 21세기판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려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영도소조의 수석 부조장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막후에서 정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2년 후의 19차 당 대회에서 현재 선전과 이데올로기를 맡고 있는 류윈산(劉云山)을 대신해 최고 집단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왕후닝은 95년 펴낸 『정치적 인생』에서 “누가 정치인인가? 죽음 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념, 동서양을 넘나드는 학문,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인격, 멀리 내다보는 시야, 불요불굴의 의지, 모든 냇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도량, 대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닮고자 하고 또 그가 빚어내고자 하는 중국 리더의 모습이다. 중국의 굴기는 괜히 이뤄지는 게 아니다.

유상철 중국 전문기자

첫 부인은 공부벌레 동기
두번째는 12세 어린 제자
현재 부인은 30세 연하

왕후닝의 첫 부인은 동갑내기 푸단대 친구 저우치(周琪)였다. 동급생과의 사랑(同學戀)으로 불린다. 연애란 게 고작 함께 책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둘 다 공부를 위해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공부를 위해 헤어졌다.

두 번째 부인은 왕의 푸단대 제자로 열두 살 어린 샤오쟈링(蕭佳靈)이었다.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師生戀)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왕이 베이징으로 가 정치의 길로 나서고 샤오는 상하이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면서 결별하게 됐다고 한다.

세 번째 부인은 왕보다 서른 살 어린 미모의 여성으로 알려진다. 학자는 아니다. 한 세대가 차이 나는 세대연(世代戀)이라 할 수 있겠다.

왕후닝은

1955년 10월 상하이 출생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석사, 교수
푸단대 법학원 원장
현재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및 중앙정치국 위원

‘한눈에 열 줄씩 하루 3권 읽는다’
‘살아있는 정치학 사전’으로 불려
29세 푸단대 교수 … 장쩌민이 발탁
주석 3명 막후서 ‘은둔의 책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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