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95)제80화 한일회담(194)|한국통「마에다」방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일본정부는 61년8월6일 「마에다」(전전리일) 외무성 북동아 과장을 서울로 파견했다. 현재의 「마에다」 주한일본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인천에서 나서 경성중학(지금의 서울고)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거쳐 해방 전에는 총독부 관리로 일했던 「마에다」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일본 의무성내의 제1급 한국통이었다.
그의 한국말은 본인의 말을 빌면 『지금은 다 잊어먹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화에 별 어려움이 없는 유창한 솜씨다.
「마에다」과장의 방한목적은 한마디로 한국의 내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군사정부와 한일회담을 재개해도 좋은 건지, 그럴만큼 군사정부가 굳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마에다」씨는 열흘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당시 박동진외무차관을 예방하고 엄영달 아주과장과는 실무회담도 가졌다.
「마에다」씨는 또 경제기획원과 상공부 실무진 및 각계각층 인사들과도 접촉했다. 그가 이들과 만나 수집한 군정하의 민심동향과 여론은 귀국후 「방한보고」로 꾸며져 일본정부의 대한교섭 지표를 마련하는 자료가 되었다.
「마에다」씨의 방한보고는 『군정의 전도에 대해 낙관할 만하다. 따라서 현 군사정부와 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일본외무성은 이 「전전보고」를 토대로 한일교섭을 다시 시작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마에다」씨의 방한때 카운터파트였던 엄영달씨로부터 그의 방한에 얽힌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마에다」씨는 5.16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 우리나라를 찾아온 일본관리였지만 나와는 민주당시절부터 잘 알던 구면이었죠. 때문에 나와 「마에다」씨는 양국의 실정이나 현안문제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 결과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마에다」씨의 방한은 그러나 양국 정부간에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될 당시 약간의 잡음도 있었다.
『일본외무성은 「마에다」씨의 방한을 제의하면서 우리 정부 고위 지도자와의 면담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김홍일 외무장관 등을 만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의전상 좀문제가 있었어요. 일개 외무성 과장이 국가원수나 최고지도자를 쉽게 만날 수는 없는 것이 외교관례입니다. 그래서 우선 내가 나서서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바로 민주당 정부때 「이세끼」(이관) 일본외무성 아주 국장이 왔을 때 윤대통령과 장면총리가 쉽게 만나주는 바람에 국민들로부터 저자세 외교란 비난을 들었는데, 또다시 그런 식을 되풀이해서 주권국가로서의 체모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우겼어요. 그래서 예방은 외무차관만 받아주기로 하고 민간인 접촉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선하지는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에다」씨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국내의 많은 저명인사들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숙소까지 찾아가 「한일국교 정상화 문제를 추진하는 동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울테니 불러달라」고 접근하는 통에 「마에다」씨가 머무른 호텔은 문전성시였다고 합니다』
외교란 본래 입장이 강한 쪽, 약한 쪽이 있게 마련이지만 입장이 다소 약하다고 해서 마구 허리를 굽힐 수는 없는 것이 국가간의 관계다.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걸핏하면 튀어나온 「저자세 외교」시비는 바로 이런 사소한 점을 소홀히 한데서도 빚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