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영화 ‘킹스맨’이 준 정치적 카타르시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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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24면

(주의:스포일러 포함)
“그냥 재미있고 콜린 퍼스의 ‘신사복 액션’이 멋져서가 아닐까. 눈에 띄는 한국영화 경쟁작도 없었고.”

스파이 영화 ‘킹스맨’이 국내에서 600만 관람객을 돌파하고 패러디가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 친구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독특한 폭력 장면들과 그 바탕에 깔린 정치적 냉소주의도 추가하고 싶다.

이 영화의 폭력은 ‘막가파식’이면서도 관객을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머리 폭발 등의 장면이 워낙 초현실적이고, 폭력의 대상이 정치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속된 말로 ’이놈저놈 다 까이기 때문에’ 그렇다.

영화 ‘킹스맨’의 한 장면.

‘킹스맨’의 압권 중 하나로 뽑히는 교회 장면을 보자. 미국 중남부에 실제로 종종 있는 ‘꼴통 보수 교회’에서 백인 목사와 신도들이 미국이 망하는 이유가 낙태, 동성애, 흑인, 유대인 때문이라고 합창하며 기도한다. 그렇다고 신도들이 기득권층인 것도 아니다. 팍팍한 삶의 울분을 소수자 혐오로 돌리는 무지한 서민들이다. 여기에 IT 천재 악당 발렌타인(새무얼 잭슨)이 인간의 분노 절제력을 없애는 전자파를 발동시키자, 교회 사람들은 서로 때리고 죽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신나는 배경음악이 깔리며 희화화된다.

이 교회 신도들과 대척점에 선 발렌타인도 좋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흑인으로서 초강력 IT기업을 일궈낸 메리토크라시(태생이 아닌 능력으로 보상받는 체제)의 본보기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 환경문제와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고, 관련 기부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골로 빠져서 지구온난화의 절박함을 종교처럼 믿게 됐다. 그래서 지구를 망치는 바이러스 같은 인간들을 적절한 수로 줄여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미국 동서부에 종종 보이는 환경문제에 특히 집착하는 독선적 진보 지식인의 풍자다.

발렌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심판’에서 살아남도록 선택한 자들은 메리토크라시 상층부의 유명인사들이다. 여기에는 오바마를 닮은 미국 대통령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킹스맨이 발렌타인의 계획을 저지하는 와중에 그들은 머리가 불꽃놀이처럼 폭발하는 신세가 된다.

혹시 이 영화는 메리토크라시를 혐오하고 복고적인 아리스토크라시(귀족정치)를 꿈꾸는 건 아닐까. 하지만 영국 명문가 출신 킹스맨 후보들은 이기적인 바보들로 묘사되고, 킹스맨의 귀족주의 수장 아서는 발렌타인의 설득에 넘어간다. 그렇다면 일반 서민에게 희망을 거는 걸까. 하지만 에그시(태론 에거튼)의 주변 인물들은 한심하게 묘사될 뿐이다.

한마디로 ‘킹스맨’에서는 엘리트, 서민, 보수, 진보가 닥치는 대로 까인다. 매튜 본 감독이 “그냥 재밌으라고” 넣었다는 그 장면들에는 짙은 정치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아서의 귀족주의와 발렌타인의 능력주의가 함께 멸망하고 일반 대중은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는 가운데, 살아남는 것은 해리의 뒤를 이은 에그시의 빛나는 ‘수트빨’과 우아한 액션 뿐이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명언을 살짝 바꿔 인용하자면 “이념은 시들고 스타일만 남는다.” 바로 이 점이 누적된 사회문제와 정치적 진영 싸움에 지쳐버린 한국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게 아닐지.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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