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간 아들이 나보다 더 늙었더라|일「주간아사히」, 북송자참상 보고온 북한방문기 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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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의 「주간아사히」는 4월20일자 호에서「감동의 드라머-25년후의 현실」「드디어 재일육친이 말하기 시작한 북한귀환자 10만명의 절망」이란 제목으로 북송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다루었다.
취재에 응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절대익명·신원을 알 수 있는 표현은 절대 하지말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내가 말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저쪽의 우리 애는 총살된다』는 것.
이들의 입을 통해 밝혀진 「북한방문단」참가자들의 육친과의 면회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평양·원산·청진·사리원등 어느곳의 호텔에서 만날 것. 또 하나는 자택을 방문, 2박정도 하는 것이다.
고등학교졸업후 단신 북송선을 탄 장남을 10여년만에 만나보겠다고 찾아간 어느 노모의 경우 면회장소로 지정된 평양의 호텔에 나타난 것은 장남이 아니라 친척 여성이었다.
그 여성도 힘깨나 쓰는 연줄이 있어 면회를 허가 받았으나 만나고 싶은 아들은 공장책임자의 허가가 없어 못 왔다는 얘기였다.
요행히 가족을 만난 사람들도 너무나 변모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보다 늙어버린 아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나 눈초리가 매서워져 있었다. 살이 찌거나 더 젊게 보인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생을 만나러 갔던 어느 형의 이야기.
『호텔방에 들어오자 재회의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입구에 걸려 있는 김일성초상을 향해 「위대한 수령님」어쩌고 하길래 「야, 무얼하는거냐」하고 물었더니「쉿」하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시늉을 하더니 계속 위대한, 어쩌고 저쩌고하는 거예요.
동생은 일본에서 일류대학 공학부를 나온 인텔리였다. 그 동생이 갑자기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형은 놀랐다.
동생이 작은 소리로 일러준 얘기는 호텔방에 도청기가 설치돼 있어 그 도청기에 들리라고한 소리였다는 것이었다.
집으로의 방문이 허락돼 숙박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도원이라는 자가 세끼식사를 같이 하며 잘 때 이외에는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잠까지 함께자는 지도원도 있었다.
북송선을 탄 사람중에는 학생이 많았다. 「장학금」이라는 미끼에 걸려 북한을 조국으로 착각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 동생을 먼저 보내고 자신도 대학졸업 후 뒤따라 가려 했던 어떤 형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어느 공산권국가에서 날아온 동생의 편지를 받아 보고 아연했다.
동생이 그 나라에 유학한 아는 사람을 통해 보낸 편지인데 내용은 『일본서 걸식을 하더라도 절대 오지말라』는 것.
그때까지 북한에서 보내오던 편지와는 정반대의 내용이었다.
검열을 피해 제3국을 돌아온 편지에 따르면 동생은 예술관계대학을 지망했는데 인연이 먼 의과대학에 강제입학이 됐다.
그러나 대학은 말 뿐이고 오전중 짧은 강의를 끝낸 뒤에는 도로나 건물 건설현장에 나가 중노동을 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라는 것. 여자도 마찬가지로 일을 시켰다.
감기나 열병이 나는 정도로는 쉬게 하지도 않고 허가 없이 쉬면 식권이 나오지 않는다고했다.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도 신분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없다. 역사나 문학등 인문과학계학자들의 운명은 특히 비참하다.
동경에 있는 조총련계 고급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사학자 임광철, 2대교장이던 철학자 송지학은 북송선을 탄 후 소식이 끊겨 쳐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도대공학부에서 강사를 하던 염성근도 대학원생 몇명과 북송선을 탄 후 소식이 끊기고 있다.
일본의 모 일류사립대를 나온 형이 평양의 어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을 방문했던 동생은 북한당국이 북송선을 탄 지식인을 어떻게 매장시키는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1백80cm의 거한이던 형은 주름투성이의 왜소한 몸으로 쫄아들어 있엇다. 집도 없고 바위투성이의 산중에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동경=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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