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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내 몸이 실험도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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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근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연구에 쓰인 난자 공여 문제가 도마에 오르면서 여기저기서 '헬싱키 선언'이 거론되고 있다.

1964년 제정된 헬싱키 선언문에는 인체를 가지고 연구를 할 때 반드시 목적.방법, 얻을 수 있는 이득.위험성 등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고 피험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동의를 얻은 뒤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언제나 '만의 하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과학 연구에 자기 신체를 자발적으로 헌납할 지원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즐겨 쓸 수밖에 없는 실험도구가 바로 '자신의 신체'다.

#"기생충아, 모기야. 내 영양분 먹고 무럭무럭 자라다오."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생충 전문가인 단국대 의대 서민(39) 교수는 기생충을 자기 눈 속에 넣고 키웠던 일화로 유명하다.

2001년 '동양안충의 중간 숙주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성숙한 동양안충을 인공적으로 '양육'해야만 했다. 동물의 눈 속에 자리 잡아 영양분을 빼먹고 사는 동양안충은 보통 개의 눈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파리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되기도 한다.

서 교수는 우선 매개체가 될 파리 채집에서부터 자기 몸을 사용했다. 그가 잡은 파리는 몸길이 7㎜ 정도의 아미오타종 초파리였다. 유독 동물의 눈물을 좋아해 눈으로 달려들기 때문에 동양안충을 옮길 매개체로는 적격이었다.

충북 충주의 한 야산에 올라간 뒤 하루 종일 한 손엔 잠자리채를 들고 숲을 보며 앉아 있다가 파리가 달려들면 잽싸게 잡아챘다. 그렇게 잡은 초파리의 몸속에 개의 눈에 있던 동양안충을 심어 일정기간 배양한 뒤 이번엔 자기 눈 속으로 옮겼다. 기생충이 개에서 사람에게 옮겨지는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서였다.

동양안충은 보통 염증 정도만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할 경우 실명이 된 사례도 있을 만큼 나름대로 위험한 기생충이다. 서 교수는 동양안충을 넣은 뒤 며칠 동안 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연구 결과는 그해 기생충 학회에서 발표됐다.

국립보건원 의동물과 모기담당 연구원들 역시 모기 생태, 질병 감염 경로를 알아내기 위해 한 몸을 온전히 바치고 있다. 서울 근교 소 목장에서 잡아 온 모기들을 키우기 위해 번갈아가며 일주일에 한번 씩 모기장 안에 팔을 들이밀어 '헌혈'을 하는 것이다. 모기 채집 때는 꼭 반바지를 입고 간다. 모기를 유혹하는 '인간 미끼'가 되기 위해서다.

#"신약개발 1차 임상시험은 내 몸에서부터"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 권위자인 충남대 서상희(40.수의학) 교수는 지난해 9월 자신이 개발한 AI 백신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자기 몸에 꽂았다.

한국생명과학연구원 영장류센터에 있는 원숭이들을 통해 안전성과 면역 효율성 등을 확인했지만 인체에 대해서도 유효한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AI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던 터라 제자들 중에 "나도 접종해 달라"는 자원자도 많았지만 모두 말렸다. 혹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을까 우려해서였다.

서 교수는 "내가 연구한 것이기에 안전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있게 주사기를 꽂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 초 획기적인 신약물질을 개발해 특허를 받은 태평양 의약연구소 수석연구원 박영호(37) 박사 역시 자신의 얼굴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했다. 박 박사가 3년여의 연구 끝에 개발해낸 PAC20030은 고추의 매운 성분인 '캡사이신' 연구를 바탕으로 발견한 통증치료물질이다.

마약 성분에 의존했던 기존 진통제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신물질이라 박 박사의 기대는 대단했다. 어느 정도 효능이 있나 궁금한 마음에 일단 자신의 얼굴에 발라 본 뒤 그 위에 고농도 젖산을 묻혀봤다. 꽤 많은 양의 젖산을 발랐는데도 통증이 없자 신이 나서 농도를 계속 높였다가 얼굴에 시뻘건 염증이 생겨 며칠간 고생하기도 했다. 박 박사는 "과학자들에게 연구성과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라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딸이라고도 하는데 하물며 내 연구성과를 내 몸에 시험에 보지 못하겠느냐"고 말했다.

#프리스틀리.뢴트겐 모두 자기 인체 실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중에도 자기 몸을 실험도구로 삼았던 경우가 많다.

산소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조셉 프리스틀리(1733~1804)는 적색 산화수은을 가열하는 과정에서 얻은 기체에 쥐를 넣어보고 또 직접 마셔봄으로써 산소의 존재를 알아냈다.

염소 등을 발견한 스웨덴의 화학자 칼 셸레(1742~1786)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꼼꼼한 성격 때문에 화학 물질을 직접 맛보고 확인해야만 만족을 했다. 결국, 비산.염화제이수은.시안화수소와 같은 독극물까지 직접 맛봤다가 요절하고 말았다.

뢴트겐(1845~1923)이 X선을 발견한 뒤 이를 이용해 가장 먼저 찍어 본 사진은 자신의 손이었다.

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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