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본 조자양 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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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자양중공수상이 이산가족재회를 위해 중공내 한인들과 한국내 가족들에게 상호방문을 허용하겠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북한의 완고성과 상대적으로 유연한 중공의 태도를 새삼 비교하면서 역시 중공은 대륙적이라는 평가가 은연중에 나돌고 있다. 그러나 중공의 이런자세를 「대륙적」이라는 중국인의 기질로서 이해하기보다는 국제사회의 흐름이 만든 논리적 귀결로서, 또는 중공자신의 수요에 따른 어쩔수 없는 상황전개 쪽에서 보아야 보다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중공이 대륙적이고 대국의식이 있었다면 왜 83년 중공민항기사건 직후 중공에서 열린 국제기구 주관의 회의에 한 때 우리대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해명이 안된다.
한·중공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기미를 보인 것은 78년부터 였다. 78년이라면 모택동 사망이후 실각했던 등소평이 서서히 실권을 장악하고 미·중공관계가 수교관계로 선회하던 무렵이다.
낙후된 산업을 근대화하고 교조적 공산주의 이념만으로는 국가재건이 난망이라는 판단하에 서구에 창을 열던 시기였다.
이때 비로소 한·중공은 제3자를 통해 무역을 개시했고 중공교포의 귀국이 허용되기 시작한 해였다. 미·중공이 수교한 79년 한·중공무역은 급팽창했다. 교포들의 영주귀국도 상당수에 달했다.
그러나 간접무역은 80년말 북한의 강력한 항의제기에 따라 81년부터 다소 주춤해졌다. 호요방총서기가 한국경제를 배워야한다고 강조했음에도 한국과의 무역을 자제하라는 지시가 각성에 시달됐다.
그렇지만 80년에는 처음으로 중공교포의 일시귀국이 허용되어 인적 교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는 중공의 대만정책과 연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중공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내놓은 제의와 비슷한 제의를 대만에 거듭 촉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당국자회의나 상호방문·통상등이 그것이다.
중공이 이같은 맥락에서 무력통일방안을 고수하고 이산가족재회를 거부하는 북한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대만에 그 진의를 왜곡당할 위험이 다분히 있다.
대만문제를 민족내부 문제라며 제3국의 개입을 단호히 배제하는 중공이 북한의 3자회담을 지지하는 것도 모순이라는 점을 그들은 잘 알고있다. 그래서 외빈을 만날 때는 북한지지를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번 조자양수상의 발언은 미·일과의 협조를 통해 자국 현대화를 촉진하고 강대국으로서의 지역안정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며 나아가 무시하기 어려운 국가성장을 한 한국의 국제지위를 고려하고 대만에 대한 제의가 구두선이 아니라는 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태도천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미 해오고있던 것을 최고책임자가 천명했다는데 의의라면 의의가 있고, 그만큼 시세가 변화했다는 증좌가 아닐까. <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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