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차기 FRB의장, 인플레이션 목표 놓고 이메일 가상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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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앨런 그린스펀이 18년간 지켜온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직을 내년 2월 1일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에게 물려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 학문적 배경, 경력이 사뭇 달라 버냉키의 FRB는 그린스펀 시대와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면 이런 말이 오고갈 것이라는 '가상 대화'를 소개했다.

◆ 버냉키=오늘이 첫 출근입니다. FRB의장이 경제에 관한 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특히 당신이 전지전능한 사람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텅 비었더군요. 당신의 귀중한 보물은 다 어디 갔나요.

◆ 그린스펀=아, 그야 베스트셀러가 될 책을 써보려고 내가 모두 가져왔지. 하하, 농담이네. 알겠지만 난 자네와 농담하는 게 재미있어. 충고 하나 하겠는데, (정책을 시행할 때) 경제 모델이나 규칙에 속박되지 말아야해. 경제는 어떤 모델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 1990년대에 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고, 경제가 예상외로 고속 성장을 했지만 특별한 경제 모델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 중요한 것은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야. 98년 러시아의 국가부도 사태를 떠올려 보게나. 당시 통상적인 처방은 FRB가 금리를 올리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우리는 금리를 내렸지. 그 결과 위기는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 버냉키=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온당치 못합니다. 그래요, 나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문적 경력을 쌓았죠. 그렇다고 나를 기계적인 모델을 선호하는 '상아탑 로봇'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인플레이션 타깃팅'에 대한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FRB의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 타깃팅처럼) 명확한 인플레이션율을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런 정책이 FRB의 정책 입지를 줄여놓을 것이라 말하겠지만….

◆ 그린스펀=당신이 그런 유연성을 갖췄다면 인플레이션 타깃을 정하는데 무얼 그리 망설이시오.

◆ 버냉키=예전에 FRB가 대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세 암흑기'는 끝났습니다. 이제 세계 금융시장은 FRB가 뭘 하는지를 늘 주시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설정한 목표와 방법에 대해 우리 스스로 혼란에 빠진다면 붕괴를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투자자들이 FRB의 중장기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투자자들은 우리의 정책을 예측하면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될 것입니다.

◆ 그린스펀=나도 대락 연 2% 정도의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갖고 있다네. 그러나 당신과 다른 점은 나는 그 목표치를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울 필요가 없었고, 물가가 뛸 때마다 사람들이 내가 뭘 할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네. 인플레이션 타깃팅은 일면 우아해 보이지만 그걸 대중에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네. 어디서부터 시작할텐가. 올해 할텐가 아니면 먼 미래에 할텐가. 근원물가지수에 포함되지 않은 유류비와 식료품 가격을 물가 산정에 포함시킬 건가 말건가. 자네가 더 많이 공개할수록 더 많이 설명해야 하고, 더 많이 오해받을 것이네. 또 자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6명의 FRB 이사와 12명의 지역 연방은행 총재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하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투명성은 떨어지기 마련이지.

◆ 버냉키=상원 청문회에서 나는 모든 정책을 FRB 내에서 충분한 합의가 이뤄진 뒤 천천히 시행하겠다고 증언했지요. 일부 FRB 이사들이 나의 접근방식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들이나 총재들은 모두 나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죠.

◆ 그린스펀=투명성 얘기를 하는데 그게 당신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지. 많이 공개할수록 FRB 내에서 불협화음이 잦아질 것이기 때문이야. 나도 FRB 이사들과 자주 다퉜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메시지와 불확실성을 뒤섞으라는 것이야. 자네는 가능한 한 빨리 (나처럼) 난해하게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네.

정리=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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