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0)한일회담 한국대표단-제80화 한일회담(16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외무부는 이미 제어하기 힘든 상황으로 돌입한 북송 문제를 어떻게 하든 돌려보기 위해 한일회담 조기 재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자니 연초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고 유엔으로 귀임한 임병준씨의 후임자를 물색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조 장관과 나는 이호 대표에게 수석 대표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일치를 보아 우선 이씨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이씨는 「사와다」일본측 수석 대표가 동경제대의 대선배라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때 자유당 말기의 실력자인 이기붕 국회 의장이 『우양(허정 선생의 아호)이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했고 임철호씨와 경무대의 박찬일 비서관 등도 동조했다.
이 의장은 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양이 서울시장으로서 자유당의 선거 채비에 비협조적이라는 자유당 내의 반발 대문에 6월에 우양을 사직케 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이 의장은 8월초 나를 불러 당시 속초의 구 김일성 별장에서 휴양중이던 이 대통령에게 가서 재가를 맡으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도 쾌히 응낙했다.
나는 부산 해운대에서 피서 중이던 우양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서 빨리 올라오시라는 전갈』이라고 말하고 그 연유를 간략히 설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맡느냐』고 주저했으며 『어쨌든 국가적 위난 앞에 선생께서 승낙해 주어야겠다』는 나의 간곡한 요청에 대해서도 선뜻 응할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의장과 장경근 의원 등도 전화를 걸어 수락을 종용했다.
우리측은 당시 8월 12일에 회담을 재개키로 일본측에 통고해 합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단의 인선은 초미의 사안이었다. 그래서 쌍발의 대통령 전용기를 부산에 보내 8월 10일 허정씨를 상경시켰다.
그날 허씨는 바로 경무대로 가 그 자리에서 발령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내일 동경으로 떠나라』는 말씀 이외에는 별말이 없었을 만큼 북송을 저지하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이심전심의 무언의 엄명을 했다고나 할까.
대표에는 유진오 선생이 추가됐다. 재일 교포 법적 문제는 물론 이미 한일 회담 대표 경험이 있는 노련한 법률가의 보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호·장경근·최규하씨 등의 대표와 교체 수석에 유태하 주일 대사의 진용이었다.
반도호텔에서 대표단과 조 장관 및 필자 등은 이날 밤은 물론 11일 새벽 3시까지 철야하며 회담 대책을 협의했다.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 문제를 선결 문제로 회담을 진행함으로써 북송을 저지키로 방침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다른 사항은 활동비 문제였다. 허 수석 대표 등은 이번 회담은 종전과는 달리 북송 저지에 주안점이 있는 만큼 대교포 선무는 물론 일본측과도 활발한 접촉을 해야 하니 활동비가 넉넉해야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고 주일 대표부에서도 같은 의견이 이미 제출되어 있었다.
나는 돈 걱정은 말라고 했다. 이즈음 경무대에 올라가 이 대통령을 뵐 때면 『북송 저지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려 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나는 8월 11일 이 대통령에게 『못사는 재일 교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대표단의 활동을 원활히 해 북송을 막기 위해선 60만달러는 지원해야 된다』고 말하고 준비해 간 소요 자금안을 내밀었다.
이 대통령은 이에 『자네 돈이 있으면 내게. 정 없으면 경무대를 저당 잡혀서라도 주선하게』하며 난색을 표했지만, 내가 『경무대를 잡히더라도 재가해 주셔야 한다』고 말하자 마지못해 반을 깎고 30만달러만 지출토록 결재했다. 이 돈은 4·19후까지 남아 주일 대표부의 활동에 요긴하게 쓰였는데, 이 대통령이 이처럼 거액의 외화를 외교 활동비로 재가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