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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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과연 미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지방답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선진조국으로 가는덴 얼마나 많은 견제와 장애가 있을 것이며 국제사회가 얼마나 냉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10여년전 우리의 수출이 불과 10여억달러이었을때도 미국은 거의 팔을 비틀다시피하여 한미섬유협정에 사인시켜 국제관계의 생리를 실감케 해주었다.
당시 이낙선상공장관은 협상과정에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지 『「예스」냐 「노」냐만 말하라 하니 우리가 패전국이냐』고 항의할 정도였다.
그때의 교훈을 잊고 우리의 긴장이 풀리는 듯싶자 미국은 컬러TV에 대한 덤핑판정으로 다시 경각심을 높여주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에 당해봐야 국제사회에 있어서 『혈맹관계는 혈맹관계고 거래는 거래다』하는 것을 실감한다.
미국같은 경제대국도 선거같은 걸 앞둬 나라안이 급할 땐 사정 없다.
평소엔 대국으로서 체신도 있고 오랜 우의도 생각하나 일단 유사시엔 마지막 벼랑까지 밀고간다.
그동안 원조로, 차관으로 스스로 일어서도록 많이 부축해줬지만 자립단계를 지나 자신의 영역을 넘본다 싶을땐 가차없이 응징한다.
결코 양호우환의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아직 호랑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평소 은인자중해야지 일이 나고나면 늦다.
컬러TV에 대해 14·6%의 마진율을 때려 놓고도 『이것은 보호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공정치못한 거래에 대한 자구적 대응조처다. 국제관례에도 어굿나지 않는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한국이 작년에 대미무역흑자가 좀 났다하나 무역수지는 여전히 만성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안고있는 외채만도 4백억달러가 넘는다는 것은 알바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한국이 미국에서 사간 것보다 많이 팔았다는 것만 지적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대외공신력을 높이기 위해서, 또 내치용 필요에서 우리경제를 실제보다 좀과장해 자랑했다해서 그것을 백분 이용한다. 『귀국은 물가안정·성장·국제수지개선등 3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하니 이젠 어려운 우리를 좀 도와줘야겠소. 책국의 실업율은 4%밖에 안되는데 선거를 앞둔 우리는 8%나 되오.
귀국의 수출 때문에 우리 일자리가 없어지니 우리 실업자들을 살리기 위해 수입규제를 좀 해도 이의가 없겠지요』해도 할말이 없게됐다. 아무리 정책적 필요 때문이라 해도 분수이상으로 떠들게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 셈이다.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에 가입한다는 것도 실제 그럴 형편이 돼서가 아니라 국민의 사기진작용인데 그걸 빌미로 잡다니 대국의 금도가 아니다.
밖에서 잘한다 잘한다할 때 조심하지 않고 정말 그런줄 알고 너무 우쭐한 것도 사실이니 누굴 원망하랴.
또 양담배단속같은 시항착오도 가차없이 발목을 잡는다. 지난번 양담배사건도 몰라서 그렇게 크게 벌였겠는가. 국책으로서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한건 올린다고 한번 해본 것인데 그것을 수입규제의 상징이라고 그렇게 야단이니 이젠 한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컬러TV사건은 한국적 기준으로 바깥세상을 봐선 안된다는 것을 잘 깨우쳐 줬다.
지난연말 「레이건」대통령이 와 혈맹관계를 재확인하고 「낸시」여사가 심장병어린이를 데려가는 걸 보곤 한미관계는 만사형통할줄 믿었다. 설마 노조가 말썽을 부리고 의회가 그렇게 센줄을 알았는가.
위에서 잘하기로 했으니 모든게 일사불란 잘 될줄알고 턱 안심했던 것이다. 그동안 의원외교는 오죽이나 많이 했는가. 다원사회가 불편한 점도 있다.
컬러TV 마진에 대한 엄청난 격차도 한국적 관행을 저쪽에서 덜 이해 한데서 빚어진 것 같다.
국회질의답변에서 모범을 보이듯 과학적 논거에 근거한 논리적 설명보다 이심전심으로 알아차리라는데 익숙해 있다.
『그렇다면 그런줄 알지 왜 꾜치꼬치 따지느냐』면 얼른 『잘 알았읍니다』하는데 습관되다보니 납득되지 않으면 수긍하지 않는 저쪽 풍속과 마찰이 생긴 모양이다.
그렇지않고서야 우리는 기껏 5%가 넘지 않을것으로 예상했던 마진율이 어떻게 14·6%나나올수 있는가.
우리가 선진에 가까와져 국제사회와 접촉이 많아질 수록 한국적 관행과 기준은 뜻하지않는부딪침을 당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선진조국으로 가려면 빌딩과 공장을 근대화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의 의식 사이클을 국제사회의 그것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비싼 댓가를 치르고 배운 것이다.
이번 컬러TV 사건이 우리에게 많은 당혹과 섭섭함을 안겨주었지만 선진조국으로 가는 자세를 일찌감치 다지게 했다는 점에서 미국에 오히려 감사할 점도 있다 할 것이다. 최우석 <부국장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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