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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금요일] '패스포트 킹' 크리스티안 칼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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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세인트키츠네비스.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작은 점에 불과한 불과한 소국이다. 인구는 4만8000명. 영국령이었다가 1983년 독립했다. 주 생산품목은 사탕수수와 고구마다. 2005년 세인트키츠네비스는 위기에 빠졌다. 사탕수수 재배 농장이 문을 닫으면서다. 갱들이 활개치며 폭력이 만연했고, 범죄율이 치솟았다. 나라 빚도 늘어갔다. 살 길이 막막했다.

이때 홀연히 수도 바스테르에 발을 내디딘 스위스 출신 변호사가 이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로 3시간여 걸리는 이곳에 2006년 자산관리와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 앤 파트너스’ 취리히 지점에서 일하던 스위스 변호사 크리스티안 칼린(43)이 입국했다. 칼린은 구세주였다. 자원도 기술도 인적자원도 없는 세인트키츠네비스에 새로운 돈 줄을 만들어줬다. 여권을 팔아 돈을 버는 ‘봉이 김선달’식 모델이다. 칼린은 84년 만들었으나 유명무실했던 ‘투자 시민권 제도’를 살려냈다.

중국·러시아·중동·동남아 등의 부자들을 겨냥해 40만 달러(4억3680만원) 이상을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설탕산업다각화펀드’에 25만 달러(2억7300만원)를 기부하면 시민권을 주었다. 시민권을 받으면 그 나라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 갖는 걸 뜻한다. 투자자들은 새 국적을 얻어 여권을 만들 수 있다. 나라 입장에서는 사실상 ‘국적’을 팔아 ‘여권 장사’에 뛰어든 셈이다.

세인트키츠네비스 여권이 있으면 이 나라와 비자면제 협정을 맺은 132개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2006년에 유럽연합(EU)과 캐러비안 6개국이 상호 무비자협정을 체결하며 세인트키츠네비스 여권으로 EU 국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당연히 여권의 몸값은 올라갔다. 칼린은 세인트키츠네비스 같은 소국에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컨설팅를 해 주었다. 대놓고 시민권을 파는 낯선 모델이었지만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칼린이 ‘패스포트 킹’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투자 이민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미국이나 영국·호주 등 선진국도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영주권이나 체류 비자를 주는 투자 이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영주권은 외국인이 그 나라의 국적을 소지하지 않고도 영주할 수 있는 권리다. 세인트키츠네비스가 도입한 제도는 이런 투자이민제도와 달랐다. 오로지 시민권 판매 수익에만 초점을 맞췄다. 수입이나 자본 이득에 대한 세금은 0%다. 금융정보 등을 공개해야 할 의무도 없다.

주디스 골드 국제통화기금(IMF) 세인트키츠네비스 담당자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투자 시민권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며 (나라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시민권을 파는 여권 장사는 자원도 기술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는 매력적인 산업이 됐다. 수익이 짭짤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캐러비안 일대 이웃 국가가 휘청댈 때도 세인트키츠네비스는 시민권을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다.

세인트키츠네비스의 성공 신화가 알려지면서 칼린의 사무실은 북적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칼린의 마법에 매혹된 작은 나라의 관계자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몰려든 탓이다. 특히 세계 금융위기 여파에 시달리던 나라들이 칼린의 컨설팅을 받아 여권 장사에 뛰어들었다. 키프로스(2011년)와 그레나다(2013년), 앤티카바부다(2013년), 몰타(2014년) 등이 시민권 판매에 나섰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자메이카,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등도 이 프로그램의 실행을 검토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2014년 말 기준으로 헨리 앤 파트너스의 도움을 받은 12개국이 시민권 혹은 영주권 판매로 40억 달러(4조3680억원)의 수익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지난해 시민권 판매에 나선 EU 회원국 몰타다. 몰타의 시민권을 얻으려면 65만 유로(7억6346만원)를 기부하거나, 35만 유로(4억1109만원) 상당의 부동산과 15만 유로(1억7618만)의 국채를 구입하면 된다. 7억원 정도만 쓰면 28개 EU 회원국에서 거주하고 일할 수 있고, 미국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몰타는 지난해에만 시민권 판매로 5억 달러 이상의 돈을 끌어 모았다. 몰타의 지난해 국가 예산의 16%에 맞먹는 액수다.

시민권 판매 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특히 국내 정치가 불안한 나라의 부자들은 새 국적 취득에 관심이 많다. 뉴욕타임스(NYT)는 “주식과 부동산, 미술품 등으로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던 부자들이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여권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산을 지킬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칼린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불안한 나라에 사는 부자들은 보다 안정된 국가에서 제2의 선택지를 갖고 싶어한다. 부자들이 자산을 다양화하는 것처럼 거주지를 다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인트키트네비스와 앤티카바부다처럼 소득이나 자본 이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탓에 조세 회피를 위해 시민권을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불법적으로 조성한 자금의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도 시민권 판매 시장에 발을 들인다. NYT는 전문가들의 추정을 인용해 “‘경제적 시민권’인 제2·제3의 여권을 취득하는 데 연간 20억 달러의 돈이 오고 간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시민권 판매는 태생적으로 민감한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시민권을 사고 팔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비비안 레딩 EU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시민권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각국이 자국의 주권을 활용해 시민권을 판매하는 행위를 중단시킬만한 법적 근거는 없다.

팔린 여권이 범죄나 테러 등에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범죄자나 테러리스트가 여권을 사들여 ‘신분 세탁’을 한 뒤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지난해 11월 세인트키츠네비스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입국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나 고메즈 포르투갈 정치인은 “시민권 판매는 EU로 조직화된 범죄집단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는 미친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시민권 매매가 이민과 관련한 불평등을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 이민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데이빗 멧캘프 런던 정경대 교수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투자 시민권 제도가 러시아와 중국 등의 신흥 갑부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권 매매 시장이 커지고 부자들의 자금이 움직이자 선진국도 움직이고 있다. 시민권을 팔지는 않지만 체류 비자 발급 요건을 완화하거나 VIP 비자와 같은 ‘패스트 트랙’을 속속 만들어 영주권을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호주는 ‘골든 비자’로 불리는 프리미엄 투자 비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00만 호주달러 이상을 4년간 투자하면 영구 영주권을 준다. NYT에 따르면 현재 436명이 이 혜택을 받고 있다. 영국도 체류권을 주는 ‘투자자 비자 프로그램’의 요건을 다양화했다. 한국은 제주도와 인천 경제자유지역 등 6곳에서 부동산 투자 이민제를 운영하고 있다. 제주도는 5억원 이상의, 인천은 7억원 이상의 부동산에 투자하면 거주자격(F2)을 주고, 투자를 5년 유지하면 영주권(F5)을 주는 시스템이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사진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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