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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딸이 쓴 편지와 커플 등산화가 아빠의 노후 불안 걷어줬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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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아빠와 함께 TV를 보고 있던 주말, 한 광고가 눈앞에 들어왔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역시나 보험광고다. 내 기억 속 ‘슬픈’ 보험광고가 하나 떠올랐다. 어린 여자 아이가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앞에 선다. 한창 돈을 버는 젊은 아버지는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옷쯤 열 벌도 사줄 수 있다는 표정으로. 몇 십 년이 흐른 후 다 큰 딸은 ‘또’ 새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선다. 아버지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 버렸을지언정 여전히 두둑한 지갑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 부녀의 행복한 미소 위로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도 당신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도 종종 딸의 옷을 사주겠다고 하시는 아빠의 마음이 이런 걸까. 겉으론 강한 척하시지만 요즘 이런 식의 보험광고나 ‘은퇴 쇼크’ 등의 기사를 보실 땐 부쩍 불안해하시는 눈치다. 아버지의 불안 시나리오는 대략 이럴 것이다. 첫 번째 장면, 열심히 일해도 돈을 벌 수 없는 나이를 지나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나이가 찾아온다. 벌어놨던 돈을 일방적으로 ‘까먹는’ 시기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부동산 값 하락으로 노후자금도 충분치 않다는 설정이 두 번째 장면 정도 될 거다. 마지막 장면은 경제력 없는 부모 좋다는 자식 없다는데 자식들의 발길은 자연히 뜸해질 테고 혹 생활비라도 달라고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아빠의 불안은 결국 자신과 자식에 대한 불신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아빠 생신에 두 가지를 선물해 드리기로 했다. 어머니와의 커플 등산화, 그리고 내가 쓴 편지다. 사실 아버지에게 ‘골프’는 운동이라기보다는 ‘불안 증폭제’였다. 연습에서부터 실전까지 가진 돈만큼 누릴 수 있는 운동이기에 아버지가 “요즘 운동을 자주 못해서…”라는 말씀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먼저 등산화는 ‘무한 공짜’인 자연을 느껴보시란 의미다. 아버지의 건강한 신체만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찾아보셨으면 한다. 또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아빠와 함께할 엄마의 존재도 진하게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내 편지는 ‘보험증명서’ 대신이다. 아빠가 주신 사랑, 어디 안 가고 여기 잘 있다는 일종의 증명서다.

 행복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피쿠로스도 ‘불안’을 경계 대상 1호로 봤다. 그가 평생의 연구에서 내린 ‘불안 퇴치 방법’은 이렇다. “진정한 가치는 극장과 목욕탕, 향수, 연고 따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의해 생겨난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자연과학이며 신뢰의 감정도 자연과학 아닌가. 내 선물이 아빠를 삶의 불안에서 가뿐히 구해주기를.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