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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영문 모르고 잘리는 CE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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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외눈 나라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이다. 낯설다며 간혹 화제가 된다. 지난주 문덕규 SK네트웍스 전 사장의 항의 메일이 회자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 전 사장은 인사권자에게 보낸 e메일에 “아무 사유나 설명 없이 퇴임시키는 관행은 근절돼야 한다”고 적었다. “이런 불투명한 인사로 40년 명예와 자존심이 무너졌다”고도 썼다. 그는 지난해 말 해임됐다. 사장이 된 지 22개월 만이다. 임기를 못 채운 게 많이 분하고 억울했던 모양이다.

  사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요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리더십이야말로 경영이라는 연금술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오너 아닌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은 어디에서 나오나. 오너의 지지와 신뢰다. 지지와 신뢰? 그런데 그걸 어떻게 확인하나. 이심전심? 불안하다.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게 마음이다. 언질? 문서? 어색하고 딱딱하다. 효과도 미심쩍다. 그래서 나온 제도가 임기 보장이다. 상법은 등기 임원의 임기를 3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3년, 남의 나라 얘기다. 국내 상장사 CEO 임기는 평균 31개월. 미국 6.4년, 일본 4.6년에 비해 많이 짧다. 30대 그룹 CEO 셋에 두 명은 3년을 못 채운다. 그러니 문 전 사장의 ‘임기 못 채우고 이유 없이 잘렸다’는 항변이 공감 백배지만, 어딘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국의 CEO라는 게 그런 자리 아닌가. 오너 마음 변하면 집에 가는 자리.

 민(民)은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치자. 관(官)은 어떤가. CEO가 장관이라면 대통령은 오너다. 민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금융 쪽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달 17일 새 금융위원장 내정이 발표됐다. 그날 갑작스레 경질된 신제윤 당시 위원장은 어땠을까. 인사권자에게 사유나 설명을 들었을까. 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나 미루어 짐작은 한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경질 직전 대통령을 독대한 후 표정이 환했다고 한다. 금융위 후배들 중엔 “3년 임기는 문제없다. 이러다 부총리까지 가는 것 아니냐”는 덕담도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덜컥 경질 발표가 났고 신 위원장의 한 측근은 “위원장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한다”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내게 물어왔다.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한국의 장관이라는 자리가 그런 것 아닌가. 대통령 마음 변하면 집에 가는 자리.”

 어디 신제윤뿐인가. 역대 금융위원장도 다르지 않았다. 금융위의 전신, 금감위는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온 국민이 피를 토하며 반성, 또 반성하며 만든 조직이다. ‘권부가 압력을 넣어 부실 대기업에 은행 돈을 퍼주는 바람에 위기가 왔다. 그러니 권력에서 자유로운 금융감독기구를 만들자’. 금감위원장 임기 3년을 따로 법을 만들어 보장한 이유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 초대 이헌재 위원장부터 임기를 못 채웠다. 2대 이용근 위원장은 심지어 7개월 만에 경질됐다. 나중엔 임기 못 채우는 게 정상이 될 정도였다.

 임기 보장은 장관·CEO 리더십의 원천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금융 수장의 말이 시장에서 먹힐 리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틈만 나면 ‘금융 개혁’을 주문한다. “금융이 보신주의에 빠졌다”며 혼도 많이 냈다. 말은 맞다. 하지만 앞뒤가 틀렸다. 보신주의는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 더 극성을 부리는 법이다. 대통령과 부총리는 “금융이 고장 났다. 개혁하라”며 호통치기에 앞서 “금융위원장 임기를 보장하겠다”는 말부터 해야 한다. 수장의 리더십이 흔들리는데 무슨 개혁이 되겠나.

 외환위기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경제의 위기는 리더십 부재에서 비롯됐다. 현재 한국의 리더십은 달러보다 더 고갈돼 있다(1997. 12. 12)’며 아프게 지적했다. 지금은 어떤가. 과연 그때보다 나아졌는가. 당장 이번 금융 수장의 임기는 지켜질까. 내기를 한다면 나는 ‘아니다’에 걸겠다. 확률에 베팅한다는 도박사들이라면 어떨까. 베팅 금액은 10대 1, ‘아니다’ 쪽이 10배 많을 것이다. 현 임종룡 위원장 앞에 지금까지 열 명의 위원장이 있었지만 그중 한 사람, 윤증현만 임기를 마쳤을 뿐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