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노트] 스크린쿼터와 수상한 발언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정치권과 경제 부처는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 제도) 축소 문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일부러 발언을 흘리는 것인가. 최근 영화계는 이런 의구심과 함께 일단의 불안감을 내보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9일 민주당 강봉균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강 의원은 "한.미투자협정(BIT)의 조속한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했던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3일 한.미 경제계 오찬 자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로 한국 영화업계는 불안해한다.

미국 영화업계가 한국 영화의 수입을 늘려준다면 한국 정부가 업계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당연히 영화계는 반발했다.

또 최근 정부 인사가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해 이런저런 언급을 부쩍 자주 하는 것에 대해 정치권이 뭔가 새 전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마저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서비스분야에 관한 한.미 양자협상에서 미국이 영화상영 서비스 분야를 비롯해 라디오.TV 등 시청각 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서 긴장감을 더했다.

물론 스크린쿼터를 유지하겠다는 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기간에 내세운 공약 사항이다. 지난달 초 정부가 WTO에 제출한 서비스분야 1차 양허안에 영화분야를 제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감독 시절 스크린쿼터 유지 운동에 앞장섰던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입장도 확고하다. 그는 최근 칸영화제에 참석해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 영화는 정글의 공룡 같은 존재"라며 "스크린쿼터 정책에 변화를 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21일 정례 브리핑에서 스크린쿼터에 관한 부처 간 갈등을 묻는 질문에 "정부 내에서 심각한 의견충돌이 생길 사안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겉보기에 당장 무슨 돌발 변수가 떠오를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한.미투자협정이라는 큰 틀 속에서 현재의 스크린쿼터 정책이 흔들릴 소지는 다분하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이전에도 그랬듯 경제 논리에 스크린쿼터 문제가 말려들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스크린쿼터는 '문화주권'으로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공감대가 영화계뿐 아니라 문화예술인들 사이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