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준 칼럼] 이 시대의 힘없는 이들에게 바치는 노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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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35면

블루스 가수 김대중. 앨범 ‘씨 없는 수박’을 냈다. ‘홍대의 싸이’로 불린다. [뉴시스]

지난 주 본가에 계신 아버지께서 SNS로 한 장의 사진을 보내셨다. 문패였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매화꽃 향기처럼 훅하고 스쳐갔다. 7살이 되던 해 부엌 딸린 셋방에서 처음으로 우리 집이라고 할 만한 곳으로 이사를 했다. 붉은색 지붕에 남색 대문의 양옥집이었다. 대문에 사자머리 문고리도 달려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문패를 다셨다. 흰색의 인조 대리석 위에 음각된 검은 색 이름 석자가 선명했다.

[with 樂] 김대중의 ‘300/30’

당시 많은 아버지들처럼 당신 역시 나이 스물에 상경하셨다.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의 서울 생활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서른 후반이 되어 셋방살이 설움을 끝내고 당신 이름의 첫 문패를 다셨다. 그 때의 벅찬 감동 때문에 사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 문패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내 세대만 하더라도 문패에 대한 이런 식의 애틋함은 없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의 호수가 이를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후배 세대들에 비하면 낫다고 위안한다. 당장 취업도 해결 안 되는 마당에 집은 언감생심이다.

‘아버지의 문패’를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음악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김대중의 ‘300/30’이다. 블루스 음악이다. 2012년에 나온 컴필레이션 음반 ‘블루스 더 Blues’에 수록된 곡이다. 요즘은 검색도 쉽고 정보도 다양해서 그런 오해가 없지만, 예전에는 ‘블루스’하면 나이트클럽 쉬는 시간에 나오는 느린 발라드 정도로 취급받았다. 애조 띤 음악스타일 때문에 목화밭에서 태어난 노래가 빙글빙글 무도회장에서 오남용된 것이다.

블루스를 음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전적으로는 12마디의 기본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코드 진행이 비슷하다보니 이 장르의 음악을 듣다보면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블루스를 규정하는 데는 양식적인 것보다는 흔히 말하는 흑인들의 ‘소울’ 또는 ‘블루지함’이라는 정서적,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블루스를 이해할 수 있는 더 좋은 방식이다.

컴필레이션 음반 ‘블루스 더 Blues’.

블루스는 흑인들의 한이 담긴 음악이다. 즉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의 노래다. 남북 전쟁 전후 노예생활을 하던 흑인들 또는 갓 해방된 흑인들이 사회적으로 의존할 곳은 교회와 음악뿐이었다. 종교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흑인영가와 달리 블루스는 세속적이고 경험적이다. 머나먼 천국의 안락보다는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술 한 잔, 그리고 여인의 위로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저항가요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삶의 일부분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처지와 곤궁, 분노, 욕망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블루스 맨들은 그들의 음악에 냉소적인 풍자와 해학도 꽈배기처럼 꼬아 놓는다.

음반 ‘블루스 더 Blues’에 참여한 가수들은 홍대 음악 무대에서는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지만 대개는 무명이다. 음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강산에가 가장 인지도 높은 가수다. 이번 주에 예전 가요들을 리메이크한 ‘Beyond the blues’음반-올드 가요팬들에게 강력 추천한다-을 낸 블루스 우먼 강 허달림, 장미여관의 봉숙이를 떠올리게 하는 카바레풍의 노래를 실은 김 마스타, 존 리 후커의 ‘붐붐’을 연상시키는 로다운 30 등등이 이 음반에서 노래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가장 성공한 곡은 40년 역사의 아버지의 문패를 보며 떠올렸던 김대중의 ‘300/30’이다. 월세를 살아본 이라면 제목이 뜻하는 바를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보증금/월세 비율이다.

‘300/30’은 장조의 밝은 어쿠스틱 기타 리프와 하모니카로 시작한다. 악기들은 단출하며 경쾌하다. 가사 내용도 구보씨의 월세 방 구하기처럼 코믹하다. 방 구하러 발품 팔아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만하다. 그런데 가사에 담긴 사회적 의미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화자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을 들고 서울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 돈에 마땅한 방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동네 옥상위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가수는 계속 노래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청년들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간다. 꿈에 다가가는 속도보다 집값 올라가는 속도가 언제나 빠를 테니 말이다.

예전 블루스 음악인들이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고민이나 삶의 애환을 묘사했듯이 이 노래 역시 그렇다. 옥탑방이나 반지하방을 전전해야 하는 이 시대의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역설적인 해학 속에 그리고 있다. 이것이 블루스다. 그리고 좋은 노래다. 두어 번 들으면 노래방에서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멜로디도 단순하다. 코드 몇 개 알면 기타 들고 따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들과 유리되지 않은 평이한 구성 안에 동시대 사람들과 시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고전음악은 우리의 예술적 경험을 풍부하게 해주고 미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때로는 우리를 재현 너머 있는 형이상학과 초월론적 세계로 안내한다. 반면 발 구르고 함께 소리쳐 부르는 대중음악의 미학은 동시대의 날숨과 들숨을 함께하는 시대적 공통감과 정서적 연대감을 가져다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음악은 모든 예술의 으뜸이다.

엄상준 KNN방송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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