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탁구대표팀 새 코치 안재형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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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탁구 스타 안재형(50)이 돌아왔다. 지난 2007년 2월, 골프 선수를 꿈꾸던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탁구계를 떠난 지 8년 만이다. 지난 8일 탁구 남자대표팀 코치에 선임된 안 코치는 이철승(43) 코치(삼성생명 감독)와 함께 벼랑 끝에 몰린 한국 남자 탁구의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안 코치는 1980년대 남자 탁구의 대표적인 스타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 금메달 주역이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유남규와 짝을 이뤄 남자 복식 동메달을 합작했다. 특히 1989년 중국 여자 탁구 스타 자오즈민(52)과 결혼해 전국민적인 관심을 얻었다.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의 탁구 스타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큰 화제를 모았다.

은퇴 후 동아증권·한국체육대학교·대한항공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안 코치는 2007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아들 안병훈(24)의 꿈을 돕기 위해서였다. 운동 선수로서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 안 코치는 '골프 대디(golf daddy)'로 변신해 묵묵히 아들을 도왔다. 아들을 위해 골프백을 메고 뙤약볕 아래 4~5시간을 걷는 일도, 자동차로 10시간을 운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안병훈은 2009년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당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특급 유망주로 떠올랐다. 이후 잠시 슬럼프를 겪었던 안병훈은 지난해 유러피언투어 2부 롤렉스 트로피에서 우승하는 등 시즌 상금랭킹 3위에 올라 올 시즌 1부 투어 풀시드를 획득했다. 안 코치는 "욕심대로 안 돼서 짜증도 나고 힘들 때도 많았다. 그래도 실패 자체만으로도 얻는 것도 많았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도전하는 걸 즐겨왔다. 지금까지 이렇게 올라온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웠다"고 말했다.

'골프 대디' 생활을 하면서도 안 코치는 탁구와 연을 놓지 않았다. 온라인 영상을 통해 올림픽, 세계선수권, 각종 투어 대회를 꾸준하게 접하고, 실업탁구연맹의 랭킹을 관리하면서 국내외 신예 선수들의 흐름을 익혔다. 그랬던 안 코치에게 올해 초 대표팀 코치직 제안이 왔다. 안 코치는 "병훈이가 옆에서 컨트롤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홀로서기가 가능해졌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탁구계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그 무대가 대표팀이어서 감회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안 코치의 한국행을 반겼던 건 아내 자오즈민이었다. 아내를 '집사람' '병훈 엄마'로 부른 안 코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니까 집사람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랬다가 한국에서 대표팀까지 맡았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좋아하더라. 내 입장에서도 이제 집사람하고 위치상으로 좀 더 가까워졌으니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자오즈민은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 연매출 200억원대의 통신·IT 분야 사업가로 변신해 활동하고 있다.

안 코치는 "아들을 따라다니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는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은 종목이다. 1년동안 정말 많은 대회가 있지만 1등하는 시합은 얼마 안 된다. 그래도 실패 속에서 끊임없이 최고를 향해 도전해야 골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절실한 마음으로 인내하고 도전하는 걸 배웠다"고 했다.

탁구계에 8년 만에 돌아온 안 코치로선 더 큰 도전을 앞두고 있다. 세계 정상권에서 멀어진 한국 탁구를 다시 끌어올리는 것이다. 남자 탁구는 2010년 김민석(23·KGC인삼공사), 정영식(23·KDB대우증권), 서현덕(24·삼성생명) 등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기대를 모았지만 오상은(38·KDB대우증권), 주세혁(35·삼성생명) 등 30대 노장들에 밀려 이후 성장이 정체됐다. 국제 경쟁력도 떨어졌다. 지난해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는 8강에서 북한에 져 탈락했다. 안 코치는 "20대 젊은 선수들이 유망주란 말을 들어왔지만 아직 그 윗 세대들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 그만큼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라면서 "불안감과 위기감이 큰 시기다. 더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는 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안 코치는 당장 다음달 26일부터 8일동안 중국 쑤저우에서 열릴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있다. 더 큰 과제는 내년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다. 안 코치는 '아들을 키우는 심정'으로 한국 탁구의 부활을 다짐했다. 안 코치는 "현재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내 아들 또래다. 마치 내 자식 같다"면서 "어머니가 자식한테 떠먹여주는 역할을 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을 강하게 키우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 아들같이 젊은 선수들도 강하게 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으로 키워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지한 기자 hanskim@joongang.co.kr
사진=더 핑퐁, 안재형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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