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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임권택 영화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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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 공광규(1960~ ) ‘시래기 한 움큼’ 중에서

급속한 산업화로 잊혀진 소중한 것들
동명의 103번째 영화로 만들 생각

102번째 영화 ‘화장’을 마친 어느 날 이 시를 처음 읽었다. 도시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식당에서 시래기 한 움큼을 집어 나오다가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까지 가게 된다. 얼마나 삶이 각박했기에 시래기 한 움큼 때문에 이런 시비가 붙었을까. 알고 보면 그 야박한 식당 주인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 않을까.

 시를 읽으며 머리에 새로운 영화가 떠올랐다. 103번째 영화가 될 ‘시래기 한 움큼’이다. 이 시가 전하는 것처럼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다. ‘화장’이 그랬듯이 지금껏 내가 찍은 100편의 영화와는 다른 방식이기를 원해 단편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이다. 다큐멘터리는 처음이니 걱정도 많다. 하지만 성과에 무관하게 나의 시도 자체가 젊은 후배들에게 격려가 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다음달 ‘화장’이 개봉하고 나면 슬슬 작품 구상에 들어갈 생각이다. 진한 시래깃국 생각이 난다.

임권택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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