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2》제80화 한일회담(151)|일적-북적 회담개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북송저지사명을 띠고 제네바에 파견됐던 장택상·최규남·유광우씨등 민간대표 3명은 4월8일 한달만에 귀국했다. 이들은 김포공항에서 조외무·최인규내무·홍진기법무장관등 각부장관과 이재학국회부의장·조병옥의원등 많은출입객들의 환영을 받았다.
장택상단장이 미리 준비한 성명을 통해 『이제는 일본이 어떠한 재간을 피운다해도 그들이 원하고있는 국적의 협조는 방지 못할것』이며 『다만 우리들이 과거처럼 재일교포를 너무나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금후에 일어나는 사태는 더욱 걱정될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규남씨는 『일본이 어떠한 방법으로 책동을 한다해도 국적은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라는 확실한 언질을 했다』고 지적, 『우리의 승리는 자유진영의 승리이며 공산진영에 낙망을 준것은 철의 장막뒤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준것』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정부가 재일교포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된다고 강조하면서 『제네바에 대한 외교활동을 적극화하여 상임정부 대표가 있어야겠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우리 대표들이 귀국해 이같이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때 북한은 이일경을 단장으로한 북적대표단을 제네바에 보내 4윌13일부터 국적사무실에서 일적과 본격적인 회담을 시작했고 일본은 이를 위해 막서 일적부사장외에도 2명을 더 증파했다.
일적-북적간의 직접접촉의 음모가 현실화된것이다. 일본정부가 처음에는 북적과의 접촉을 않겠다고 했으나 국적이 협조요청에 불응하자 북적과의 직접 협상을 제의했던것이다.
「후지야마」외상은 『일적-북적간의 직접접촉이 일본정부의 공약과 논리에 배치된것이므로 철회돼야 한다』는 우리측 항의에 대해 『그것은 양적끼리의 문제일뿐 정부와는 무관한것」이라고 발뺌해 그의 후안무치 여지없이 드러냈다.
여기에서 일본정부가 2윌13일 북송을 결정한 이후부터 4월13일 일적-북적간 직접협상이이루어질때까지 밝힌 공식입장을 정리해보면-.
△2월13일=각의는 『북송희망자의 의사확인과 그 확인의 결과 북송의사가 진실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의 송환실시를 위해 필요한 중개는 국적에 의뢰한다』고 결정.
△3월6일=판원외무성아주국장은 『북한과 직접교섭은 하지않으며 국적의 중개를 얻는다는것은 정부의 대전제』라고 언명.
△3월9일=적성관방장관은 『북한이 국적의 알선을 거부하고 있기때문에 직접교섭을 진행시킬수는 없다』 고 강조
△3월10일=일본정부는 『국적의 양해하에 북적과의 교섭이라면 괜찮다』고 발표.
△3윌11일=일적은 대북적회담에서 『국적중개하에 교섭하자』고 제의.
△3월11일=막서부사장은 『국적중개는 철칙』이라고 역설.
△3월16일=일본정부와 일적은 관계자회의를 열고 『의사확인은 기정 방침대로 한다』는 기본태도를 재확인.
△3윌20일=일적은 대북적회신에서 삼국적에 의한 의사확인은 어디까지나 필요하다』고 재강조.
△3월21일=정상 일적외사부장은 『북한의 동의가 없다면 송환계획은 방조한다』고 언명.
△3윌22일=정상 외사부장은 북송계획에 관한 새로운 10개항 발표를 통해 『귀국의사의 확인과 조사기관은 절대로 필요하다』고 재강조.
이에서 보듯 일본측은 오로지 북송은 국적의 참여하에서만 이루어질것이라고 공언했으나 국적의 불관여결정을 내린 3월23일부터 태도를 돌변해 북적과의 직접교섭에 나섰던것이다.
그러나 일적-북적직접교섭은 처음부터 난항에 빠져 전도가 밝지않은것처럼 보였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