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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70년대 재야 고수들, 적수 찾아 전국 떠돌며 ‘방랑 대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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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호 26면

1979년 8월 11~14일 제3회 아마 10강전이 서울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열렸다. 전국의 아마 강자 180명이 참가했다. 11일 1차 예선 광경. [사진 한국기원]
2회 우승자 이용호 아마 6단이 선수 대표로 선서를 하고 있다.

1974년 늦가을 강만우(56) 9단과 조대현(56) 9단이 친구 서너 명과 마산으로 떠났다. 용산역에서 야간 완행열차의 비좁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떠난 여행. 다들 10대의 가출 비슷한 희열을 느꼈다. 당시 마산에선 학초배 아마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21> 세미 프로의 시대

프로 입단을 준비하는 아마 강자를 세미프로라 불렀는데,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었다. 세미프로들은 전국을 주유했다. 이들이 돌아다닌 이유는 딱 하나, 바둑대회 참가였다.

당시 바둑은 국민 취미였다. 75년 조치훈(60) 9단이 면돗날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과 일본기원 선수권전 우승을 다툴 때 ‘바둑’ 2월호가 매진될 정도였다. 선진국 일본에서 바둑기사가 인기 직업이라는 게 알려지자 바둑을 건전한 기예(技藝)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많은 소년들이 프로 기사를 꿈 꿨다. 수준 높은 아마추어도 늘어 전국 대회가 1년에 10개를 넘었다. 참가자는 적어도 100~150명이 보통이었다.

입단 대기자 급증해 사회 문제화
70년대 바둑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세미프로들은 불규칙한 생활을 했다. 전국을 쏘다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마 강자를 대국 상대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연구생 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시절이라 바둑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조건 많이 두어야 했다. 서울·부산 등 대도시엔 독수리 기원이나 영등포 기원 같은 강자들이 모이는 기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연마한 실력을 확인하려면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여기에 더 필요한 건 낙천성과 자유로운 편력의 기운이었다. 이게 없이는 바둑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60~70년대 바둑은 돈이 되지 않았다. 고(故) 조남철이나 김인(73) 9단 정도 외에는 가난했다. 세미프로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집에서는 대학 진학을 강권했다. 공부와 바둑은 둘 다 머리를 쓰는 것이다. 운동과 바둑, 혹은 운동과 공부는 가능할 지 몰라도 바둑과 공부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방랑기객(放浪棋客) 풍(風) 태도가 세미프로들에게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돌아보면 세미프로의 존재는 한국 바둑계의 한때 현상이었다. 64~86년에 한정된 일이었다. 64년은 프로제도를 정립한 해, 86년은 한국기원이 연구생 입단을 처음 실시한 때다.

70년대 입단대회는 1년에 두 번 봄 가을로 나눠 한 번에 두 명을 뽑았다. 입단 문이 너무 좁아 입단 대기자는 한없이 늘어났고, 나이 30을 넘도록 직업을 갖지 못한 세미프로가 수두룩했다. 사회적 문제로까지 인식될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 입단도 어려운데 설령 입단해도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일본을 이겨내는 실력을 갖추기는커녕 프로기단 성장에도 장애로 지적되었다.

1978년 6월 ‘울산 아마1위전’에 출전한 어린이국수 유창혁(11).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이름을 떨친 유창혁(51) 9단의 어릴 적 얼굴이다.

70년대 말에는 아마대회 10개 넘어
세미프로들은 봄 입단대회 후 가을까지는 소강상태로 지낸다. 아마추어 대회가 늦가을부터 1월까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마산 학초배와 부산 아마최고위전은 11월~이듬해 1월 열렸다.

70년대 말에는 10개가 넘는 대회가 열렸다. 아마10강전, 아마국수전, 대구 MBC배 아마선수권대회, 롯데배 아마추어최강자전, 아마최고위전, 학초배 아마최강자전, 울산 아마최고위전, 아마10걸전, 아마유단자대회 등이 유명했다. 고교생바둑대회도 있었는데 수준이 아주 높았다. 재능있는 일부 학생은 1~2학년에 입단 실력에 오를 정도였다.

자, 1월의 부산을 보자. 세미프로들은 마산 대회를 거쳐 부산으로 모였다. 제8회 아마최고위전이 남포동 한국기원 지원에서 열렸다. 참가자가 150명을 넘어, 기원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다. 주변 기원 2~3개를 빌려 개최했다.

참가자들은 대회 하루이틀 전에 도착했다. 부산은 겨울에도 따뜻한 곳. 바닷가 바람은 시원했다. 남포동 밤거리는 청년들의 그림자를 여울지게 할 정도로 화려했다. 잔술은 서면에서 맛 보고, 스탠드바 맥주는 광복동에서 맛본다. 일부는 노는 데 더 비중을 두어 여관 큰 방을 빌려서 술도 마시고 포커도 치고, 그렇게 보냈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청년들. 자신의 공부 방법이나 삶의 고민 등을 토로했다. 전국 64강 정도의 실력이면 어느 대화에나 낄 수 있었다. “A는 어땠어? 저번에 두어봤다면서. 잘 두던?” “야, 보통이 아니더라. 책을 많이 봤나 봐. 행마가 좋던데! A 만나면 조심해라.” 그런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보 제8회 아마최고위전 결승 3국. 흑5가 패기에 찬 반상의 급소.

상품 팔아 동료들 밥 사주고 용돈도
대회엔 신인이 많이 등장했다. 1년 전 무명이었던 임선근(1958~2006, 9단)이 결승에 올라 임창식(956~2005, 7단)과 우승을 겨뤘다. 2대1로 패했다. 기보는 제3국으로 임선근이 흑이다. 4와 5는 맞보는 자리로 5 모자가 패기만만하다.

규모 큰 대회는 이틀에 걸쳐 열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밤이 늦어지더라도 하루에 끝났다. 먼저 4명을 한 조로 1~2명을 선발한다. 그러고 나서 본선 토너먼트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토너먼트로 하다 초반에 강자끼리 만나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강자가 탈락하면 당연히 재미가 반감되고 흥도 식는다. 본선은 진지하다. 대국자의 긴장감이 주변에 전해져 관람객도 분위기에 쉽게 동화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패자가 많아진다. 토너먼트에서 떨어지면 뭘 하는가. 여럿이 모여 돈을 약간 걸고 또 토너먼트를 연다. 바둑 두고 싶어 몸살 난 사람들이다. 탈락의 쓰라림을 다독일 필요도 있어 작더라도 승부를 하면서 마음을 눅이는 것이다. 물론 재미도 있다.

16강, 8강…. 대회는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고 흥분을 안겨준다. 한 판 한 판 이겨서 8강, 4강에 올라가는 친구를 격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기원(祈願)할 때도 적지 않다. 그렇다. 풍족하지 못한 여행 경비지만 졌다고 당장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바둑 옆에서 살고 싶은 시간. 동료가 우승하면 술도 마시고 여행 경비도 얻어 며칠 더 놀 수 있다.

8강에 올라가면 돈이 생겼다. 부상은 믹서기 정도였고 우승은 냉장고였다. 마산 학초배에서 임선근은 우승 후 곧바로 냉장고를 팔았다. 22만원이었다. 믹서기와 냉장고를 사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있었다. 그 다음엔 너나없이 인근 식당으로 갔다. 김치찌개와 삼겹살에 소주를 돌렸다. 친구들에게 돈도 나눠주었다.

애기가들도 밤늦도록 대회장을 떠나지 않았다. 대회가 끝나는 건 슬픈 일이다. 어디 오라는 데도 없는 시간. 세미프로들은 이때가 제일 우울하다. 내년 봄, 내년 가을의 입단대회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기약 없는 공부다. 바둑 일념이지만 프로기전(棋戰)에는 나갈 수 없다. 대국료와 상금이 주어지는 기전은 프로에게만 열려 있다. 제도로 보호받지 못하는 세미프로들은 실력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우울하다. 우울은 실력에 비례한다.

프로제도의 기반이 된 아마대회
아마대회는 바둑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회는 아마와 프로의 간격을 메워주고 프로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프로가 2층, 아마가 1층이라면 아마대회는 계단과 같았다. 프로에겐 안정감을, 아마에겐 희망을 주었다.
그랬다. 바둑 문화가 발달하려면 위계질서가 필요했다. 74년 봄에서 78년 1월까지 그 4년. 바둑계는 훌쩍 컸다. 77년 열린 13개의 전국대회 중 6개가 그 4년에 새로 만들어졌다.

돌아보면 60년대 한국 바둑은 역경 속 모색의 시간이었다. 프로제도를 겨우 제도화하고 있었다. 67년 전문지 ‘바둑’이 발간됐고, 68년 한국기원 5층 본관이 관철동에 세워졌지만 바둑은 내기에 가까운 도락으로 인식돼 있었다. 심지어 조남철은 노름 두목으로도 불렸다.

70년대는 바둑의 기초가 제대로 잡힌 시기다. 성장하는 경제를 따라 바둑계도 넓어졌다. 바둑의 입장에서 권위주의 유신체제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일본에 유학해 제대로 공부했던 김인, 윤기현(73), 고 하찬석이 국수(國手)를 놓고 겨루었고, 조훈현(63)과 서봉수(63)가 1인자를 다투고 있었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져 ‘관철동 시대(1968~94년 한국기원이 관철동에 있던 시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둑을 지망하는 소년이 많이 늘었지만 성장의 시간표는 주어져 있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서 각자 능력에 따라서 성장해야만 했다. 연구생 제도가 제대로 서지 않았을 때 자신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뭔가가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 ‘뭔가’의 하나가 바로 전국 아마추어 바둑대회였다. 대회를 통해 프로 예비군은 자신을 확인했다. 놀러 다니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건 실력이 약할 때나 갖는 기분이었다. 실력이 입단 문턱에 다다르면 자각이 높아져 자세가 달라졌다. 세미프로들은 이름만 아마추어지 삶의 지향이나 생활 자세가 프로에 못지않았다. ‘경건’은 자각이 만들어내는 단어다. 즐거움과 우울을 옆으로 밀어둘 만치 70~80년대 아마대회는 경건했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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