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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만든 ‘의인물용’ 전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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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호 28면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카이사르가 한 때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아래 쓰러져 있다. 카이사르 암살 관련 그림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라고 평가받는 장 레온 제롬의 그림(1867년 작).

“3월 15일을 조심해라(Beware the ides of March)!” 지금으로부터 2058년전인 BC 44년 한 점술가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했다는 경고다. 율리우스 달력으로 이 날 카이사르는 혼자도 아니고 수십명에 의해, 그것도 몰래, 지독히 비겁한 난도질로 암살됐다.

⑬ 제휴와 배신의 이면

“3월 15일을 조심해라”보다 더 유명한 카이사르 암살 관련 문구는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다.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했다는 말인데,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자신이 믿었던 브루투스의 배신에 놀라 나온 말이라는 해석뿐 아니라 배신한 브루투스에 대한 저주로 뱉은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이사르 시해의 두 주역 카시우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브루투스(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경쟁자 폼페이우스 휘하 장수였다. 내전 후 카이사르는 그들을 사면하고 포용했다. 로마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종신독재관직을 부여했고, 또 공화정 수호자들의 반발을 유도하려했는지 몰라도 카이사르를 왕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내의 적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자신의 통제 없이는 로마가 내전상태로 들어갈 것이니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을 암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남을 믿는다는 것은 늘 위험이 따른다. 지난해 세월호 침몰 때 객실 안에 그대로 있으면 구조된다는 안내방송을 믿었던 승객 다수는 희생되고 말았다. 내가 믿지 않은 상대의 습격보다 내가 믿는 상대의 습격이 나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믿지 않고 경계했더라면 죽음을 피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물의(用人勿疑)는 간혹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원로원의 암살 주모자들은 자신들이 카이사르를 배신했다기보다 오히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정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들은 독재자를 없앤 숭고한 거사를 단행했으니 다수로부터 박수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브루투스 등 일부 주모자들은 아무런 후속계획 없이 카이사르만 제거하는 것이 순수성을 인정받는다고 주장했다. 원로원 귀족들끼리만 소통하다 보니 원로원 밖의 여론을 잘 읽지 못했고, 또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것과 카이사르를 처참하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삽입된 그림(헨리 셀루스 작)에서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가운데)가 레피두스에게 살생부를 강요하고 있다.

안토니우스, 민심 간파하고 입장 바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전개된 로마 상황은 암살 주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카이사르파 핵심인물 안토니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사건 직후엔 원로원에 협조적이다가 카이사르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후에는 원로원 책임론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카이사르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거사에 초대되지 못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와 함께 죽이지 못한 것이 큰 실수라고 지적했다. 암살 주모자들은 정권을 잡기는커녕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이나 타살로 모두 생을 마감했다. 사건 후 관심은 원로원의 권력 강화나 공화제의 공고화가 아니라 누가 카이사르를 계승하느냐로 바뀌었다.

카이사르 사후 새로운 지배자 등장의 첫 무대는 카이사르의 유언 공개였다.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 누이의 손자인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상속자가 됐고,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했다. 노련한 안토니우스를 경계하던 키케로는 덜 위협적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BC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부관으로 합류시킨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처단하려했다. 원로원 기대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제휴해 이른바 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고, 삼두 연합은 카이사르 암살과 관련된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실시했다. 특히 안토니우스 측이 키케로를 죽일 때 옥타비아누스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BC 42년 삼두 연합은 원로원파 군대를 격파했고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했다.

BC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을 처형했다. 그 가운데에 안토니우스의 동생도 포함됐다. BC 36년 레피두스의 군대를 매수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연금시키고 삼두정치를 종식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BC 30년에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결국 자살로 이끌었다. 이로써 삼두정치의 파트너인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모두 제거됐다. BC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황제(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카이사르 암살을 겪은 옥타비아누스는 용인물의 대신 의심스러운 자는 쓰지 않는 의인물용(疑人勿用)을 따랐다.

옥타비아누스뿐 아니라 그의 양부 카이사르도 최고권력자로 등극하기 전 삼두정치를 거쳤다. 카이사르는 공동통치로 로마 지배를 시작했다. BC 60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휴가 이른바 1차 삼두정치다. 1차 삼두정치 3인의 지지기반은 각각 평민·퇴역군인·돈이었다. BC 53년 크라수스의 죽음과 함께 삼두정치가 붕괴되고 카이사르의 독주가 시작됐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귀족파와 제휴했는데, BC 49년 1월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BC 48년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그곳에서 살해됐다. BC 44년 2월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추대됐고 한 달 후 암살됐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삼두정치 파트너를 제거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혼자서도 로마를 지배할 수 있을 때 굳이 남과 제휴해 권력을 나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연합은 거느린 입이 적을수록 좋다. 승리에 불필요한 연합 구성원의 존재는 나머지 구성원에게 갈 몫을 줄인다. 전리품 분배에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면 승리에 불필요한 구성원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 즉 거대연합 대신 최소승리연합(MWC·minimal winning coalition)을 지향한다.

토사구팽은 불필요한 인물 솎아내기
토끼를 잡은 후엔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도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의 하나다. BC 473년 범려는 문종과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범려는 구천이 고난을 함께해도 영화는 함께할 수 없는 위인이라며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나는 새가 없으면 훌륭한 활을 넣어두고,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며 문종에게 월나라를 떠날 것을 충고했지만,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구천의 탄압을 받아 자결했다고 사마천의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토사구팽 당사자는 한신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으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BC 201년 회음후로 격하했다. 한신은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쓸 개를 삶아먹고, 나는 새가 사라지면 괜찮은 활을 넣어두며, 적국이 망하면 훌륭한 신하도 필요없고,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당연히 팽 당한다(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고 말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독재자를 제거해서 공화제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제론 오히려 공화제를 종식시켜 최초의 로마황제를 등장시킨 사건이었다. 귀족들 다수는 사건 후 황제체제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정치적 소신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카이사르는 토지개혁 등 귀족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귀족의 이익을 빼앗아서 평민에게 주는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었다. 카이사르가 귀족의 이익을 잘 챙겨주지 않아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귀족 이익을 잘 챙겨서 귀족의 충성을 받아냈다. 즉 황제체제든 공화체제든 충성은 자신이 받는 혜택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간의 권력구조 논쟁도 대의명분보다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로 더 잘 설명된다. 권력구조에 관한 정치적 소신도 결국 권력구조에 따른 이해관계에 불과할 때가 많다. 혜택이 있는 쪽에 가담하고, 이를 감안해서 세 규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배(승리)할 수 있는 크기의 연합 만들기는 권력 장악의 필수조건이며, 이미 권력 장악에 성공한 연합에서는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 또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쪼개져 있다 보면 승리를 위해 합하게 되고, 또 합해져 있다 보면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해 쪼개지기 마련이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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