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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속의 수상|영웅 없는 북구에서 자유·평등 더 신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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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좀은 한가롭게 헬싱키의 거리구경을 하던 중에 안내를 하던 박형이 문득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개한 집이 핀란드의 수상자택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집 문앞에 경비원이 한사람쯤 있었는지, 어쨌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 건물이 바다로 면한 광장에 바로 노출된 지점이었고 그 광장은 정한 시간에 시끌벅적하게 열리는 노천시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생선이며 야채들이 즐비한 그 시장바닥에서 우리의 포장집 같은 곳에 들어가 코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아마 거기서 박형이 설명을 보탰던 것 같다. 이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수상이나 장관이 장을 본 봉투를 한아름 안고 나오는 장면을 흔하게 보는데, 그것을 보는 시민들이나 그 본인들이 조금도 낯설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에드워드」 7세든가 하는 영국 왕이 시골의 한 국민학교를 방문했는데 마중을 나온 교장이 왕에게 귀엣말로 『페하, 이 어린이들에게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앞에서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물론 빙그레 웃은 왕은 둘러싼 어린이들 앞에서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시골 교장에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랑스런 장면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명랑하며 천진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의 화제는 좀더 진지한 이야기들로 이끌려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시 환기된 것이 스톡홀롬에서 우리끼리 오고간 내용이었다. 우리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곳의 정경을 보며 스웨덴의 인물로서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삼류 과학자며 이류 기업가인 「노벨」과 음울한 희곡을 쓴 「스트린드베리」, 그리고 겨우 하나 더 찾아낸 것이 경주 고분 발굴에 참가한 「구스타프」 왕이었다. 핀란드의 인물로는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고작이었다.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무식하고 북구에 대해서는 더 무지하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적 인물들을 모른다는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이 서구의 변방에는 뛰어난 영웅이나 천재가 없었으리라는 점으로 내려졌다. 그렇게 밖에는 이들의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의 실천과 사회복지, 강대국을 이웃에 둔 외교적 지혜, 그리고 균형잡힌 문화수준과 사회적 양식의 존중을 해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정치· 경제로부터 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들에 그 이상을 위해 싸우고 피흘리며 노력한 인물이 없어야 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고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이상의 실천이라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거기서 치열한, 때로는 살벌한 냄새를 맡아야 쾌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창조적 사상가, 결연한 혁명가, 충직한 순국 (혹은 순교)자, 혹은 손에 피를 묻히고 용기와 정열에 부릎뜬 시민들의 눈이 연상되는 때문일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이 나타난다는 말처럼 우리의 고난 많은 역사는 우리의 이런 연상에 들어맞는 영웅들을 숱하게 배출했고 우리 자신이나 오늘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만이, 이들의 희생에 의해서만이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적 이상이 실현되는 것으로 배우고 또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 이상의 실현이란 이름 때문에 그 앞선이들의 사상과 행동은 범인이 따를 수 없는 위대함으로 신성시되고 그의 존재는 하늘의 뜻이라거나 역사적 소명이라거나 민족적 행운으로 존경하게 된다.
간난과 오욕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는 아마도, 아니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북구에서 피상적으로나마 관찰하고 느낀 소감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드시 그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2차대전 때는 나치의 공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위협받은 국민적 정체성을 찾아내려는 운동도 강렬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한 이들이 독립을 하고 위기를 이겨내며 오늘날과 같은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이들은 위인들의 피흘리는 헌신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범인들의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찾았던 것이다.
나라의 행정수반이라 해서 삼엄한 울타리를 치지 않고 이웃 벽돌공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손수 장을 보아 오는 그 행위 속에서 모든 시민은 똑같은 권리와 지위를 갖는 것이며 벽돌공이나 수상이나 일의 성격만 다를뿐이지 지배를 하고 지배를 받는 권력의 대척적 관계로 대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이 어떤 한 사람의 권력횡포를 허락하지도 않고 횡포를 부릴 욕심도 스스로 감히 생각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뒤집어, 그러나 조금도 역설적이지 않게 말하자면 한 사람의 위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우중을 필요로 하지만 현명한 시민들의 지혜는 굳이 헌신적인 지도자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들과 똑같은 평범한 지도자를 통해 대처해나간다.
그 평범한 시민들의 지혜와 실천이 왕에게 인사를 하게끔 만든 시골 교장의 감각이며 감히 그것을 요구하는 그에게 정중히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왕의 양식일 것이다. 몸과 마음, 생활과 풍습에 깊이 밴 이 상식이 수상의 장보기를 조금도 대견스럽지 않게 보도록 만드는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경찰이 일반 행인보다 빨리 걸어 불안감을 조성시켜서는 안된다는 조심스런 인권존중의 표현이다.
우리는 이것이 가령 국민적 존경을 받는 「시벨리우스」의 집 옆으로 국도를 내어 경비를 줄이느냐, 돈을 더 들여서라도 우회시켜 그곳을 조용히 만드느냐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는 핀란드 같은 한가한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간단히 접어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일을 중요하게 보는가가 권위에 앞선 그 사회의 일반적인 양식의 문제이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정치 권력관의 실천적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양식과 가늠자가 수상의 집앞에 울타리를 못치게 하며 시골교장에게 왕이 절을 하게 만들면서 나아가 수상의 권력행사에 울타리를 치고 시골 교장이 왕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을 이처럼 의연하게 만들고 그래서 권력을 겸손하게, 제한된 울타리 밖으로 못 삐져나오게, 그럼으로써 지도자의 희생을 사전적으로, 그리고 원천적으로 모면시키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천시키는 이 양식과 가치관이야말로 문화에 의한 문화의 소중한 소산이 아닐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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