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6) 제80화 한일회담(145)북송반대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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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송을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 못지않게 한일양국에서는 반대시위와 지지데모가 연일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조총련이 58년 가을 일본정부에 대해 북송을 허용해 달라는 집회를 벌이자 이에 일본인들이 가세해 기세를 올렸다.
민단은 58년10월께부터 반대집회를 열었으나 일본정부의 태도가 정해지지 않았던때라 미온적인 문서활동을 주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2월초 북송을 결정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민단도 2월2일 북송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반대집회와 시위를 벌여 그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막대한 자금공여를 받은데다가 일본 좌익계열은 물론 자민당과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면서 북송지지운동을 벌였다. 그에 비해 민단은 참으로 외로운 투쟁을 해야했다.
우리 정부의 자금후원은 한푼도 없이 대다수 일본인들로부터 적대걱 태도와 냉대를 받으면서 순전히 자발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정을 감안해 그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2월13일유태하공사에게 『12일 교포 북한 송환반대를 위해 시위한 애국청년들의 의거를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옵는바, 만일 귀하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면 그들에 대해 본관의 격려사를 작성하시어 전달해주기 바란다』는 전문을 치기까지 한 적이 있다.
이때만 해도 본국에서는 북송반대운동이 국민적 차원에서 전개되기 전이었다. 국내에선 2월13일 첫 반대시위가 있었고, 2월21일 북송반대 전국위가 서울운동장에서 반대집회를 연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것이다.
2월13일부터 3월5일까지 불과 21일간에 4천3백12회의 반대시위 및 집회가 전국에서 전개되었다. 참가자는 7백35만7천여명이었다. 당시 전국인구가 2천2백97만명이었던 점에 비추어 북송반대운동이 어느정도로 우리국민들에게 절실한 문제였던가는 짐작되고도 남겠다.
민단도 국내의 이같은 강력한 운동에 호응해 2월25일 동경히베야(일비곡)공원에서 관동지방 10개현에서 2백여대의 버스를 타고온 3천여명의 교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북송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갖는등 일본 주요도시 20여곳에서 동시에 반대집회 및 시위를 열었다.
민단본부가 개최한 히비야공원집회는 「일본은 명치초 정한논을 주장했고 관동대지진때에는 소위 「조선인 사냥」을 한 일이 있는데, 이재 다시 그들은 한인을 희생으로 하여 그들의 야망을 채우려하고 있다』는 등의 5개항 항의문과 결의문을 채택한 후 시내시위에 몰입했다.
이 대회에는 대일본애국당의 적미민씨(60)도 참가했는데, 일본우익계 지도자인 그는 바로 외무성을 방문,「후지야마」의상에게 우리측 입장을 전달하고 북송철회를 간청했다.
그는「후지야마」외상이 종래의 입장을 굽히지 않자 감정이 격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지야마」외상을 밀어붙여 바닥에 넘어뜨렸다. 비서와 경호원들이 재빨리 적미민씨를 제지하자 그는「후지야마」외상에게 노한 음성으로 욕설을 퍼부운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 모욕을 가해 한동안 일본안에 화제거리가 된 일도 있었으나 일본 안에서 그와같은 친한인사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날의 히비야공원 집회는 참가자가 3천여명이었는데 비해 일본경찰이 1천5백명이나 동원되어 상엄한 경비를 펴 조총련지지집회의 형식적인 경비태세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 의혈 교포청년 23명은 이날관서및 관동지역에서 각각 자전거를 타고 동경을 향해 항의시위에 들어가 1주일만인 3월3일 상오10시 1천3백82km를 주파하고 외상실로 쇄도해 항의문을 전달하는등 서울과 동경에서 의항의 기세는 절정을 이루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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