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항일소년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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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의 소년운동이 항일운동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않았다. 한국보이스카우트들의 휘장에 그려진 호랑이·태극마크, 그리고 「준비」라는 표어가 광복의 열의가 담겨진 60년전통의 산물임이 지금은 거의 잊혀져있다. 소년운동 역시 3·1운동의 좌절후에 민족의 실력 양성을 내걸고 태동한 청년·노동·농민운동등 사회운동과 맥락을 같이한다.
소년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어간 중심인물은 조철호다. 1922년10월 조철호는 중앙고보에서 8명의 소년으로 조선소년군 제1호대를 발족시켰다. 비슷한 시기YMCA의 정성채도 소년척후단을 조직했다.
소년단이 탄생하자 항일 단체들이 이를 도왔다. 특히 1921년 조선소년단 창립사무소를 설치, 소년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던 조선청년연합회가 지도역할에 나섰다.
1924년 3·1운동 5주년을 맞아 소년군과 소년척후단은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으로 통합했다. 소년조직의 통합조직인 총연맹이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이상재를 총재로하는등 그때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지도부에 올린것을 보면 그무렵의 소년운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짐작할 만하다. 통합 조직에서 실질적 리더였던 조철호와 정성채는 유덕겸을 간사장으로하고 그아래 부간사장을 두어 실무를 통합했다.

<소년 척후단도 발족>
그러나 조철호는 그해 연말 총연맹에서 이탈 조선소년군 총본부를 설치, 소년군을 부활시켰다. 조철호가 따로 독립한것은 소년척후단이 기독교와 연결되어 훈련방식이나 조직에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철호는 소년군을 이름 그대로 군대식 단련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가 있었던것같다.
조철호는 1910년대 한국무관학교를 다니다 사관양성이 일본에 넘겨지자 일본에 유학, 일본육사를 나왔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일본군 중위였던 그는 항일대열에 참여했으며 그 얼마뒤 상해로 탈출하다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신형 폭탄에 관한 자료등 일본의 군사기밀을 빼돌려 탈출했기 때문에 총살형의 위험에 닥쳤으나 용케도 육사시절 교관이던 「우에다」대좌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가출옥 되었다.
출옥 얼마후 그는 중앙고보 체육교사 자리를 맡게됐고 이곳에서 소년군 제1호대를 편성한 것이다.
소년군은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일본을 이기기 위해 고된수련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의 눈이 먼 산속을 택해 행해지는 야영훈련은 소년들에게 조선의 역사등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각을 심어주는 자리였다.
그런 소년운동이었기에 일본엔 골칫거리였다.
소년군의 집단적 항일운동은 6·10만세운동 때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일, 전국의 소년군간부와 각 중학교 대표들은 민중대회를 열기로한 돈화문앞 광장에 집결, 항일대열에 참가했다.

<일육사 나와 교사로>
총독경찰은 대량검거로 보복했으며 그속에 소년군 간부들도 포함되었다. 소년군 총사령 조철호와 60여 학생들이다. 이들은 경찰의 엄중한 문초를 받고 6월24일 검찰부로 넘겨졌으나 대부분이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했음인지 기소중지를 결정, 모두 석방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조철호를 학교에서 축출하도록 했으며 일상행동도 제약을 가해 소년군 지도를 막았다.
그해 연말 조철호는 도리없이 간도로 망명, 용정의 동흥중학교 교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도 소년군을 조직, 국내 소년군과 연결시켰다. 그러다 용정의 항일동지들과 꾸미던 어떤 일의 단서가 잡혀 일본영사경찰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왔다. 경찰은 심한 취조를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못했고 마침 국내 유지들의 조철호 구명운동도 있어 얼마뒤 풀어주었다.
1930년 조철호는 소년군총사령으로 복귀했다. 조철호의 복귀와 함께 소년운동의 항일도는 더욱 높아졌던것 같다. 32년에 참가한 김동환, 34에 참가한 이기원등은 조선소년군에 들어가서야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했다.
총독부에선 소년군에대해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으나 교재·훈련·노래 모두에서 우리말을 지켰다.
오봉환의 회고로는 소년군들중의 정예들은 항일활동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하는 독립지사들의 연락이나 척후를 맡기도했다고 했다.
그런 소년군이었기 때문에 소위 「불령선인」수사의 베테랑으로 악명높던 종로경찰서의 「미와」, 용산서의 「요시노」등 특고형사들도 소년군의 야영장에 불쑥 모습을 나타내는등 소년군 간부들을 사찰대상으로 올려 감시했다.

<특고 형사들이 감시>
조선총독부가 26만원의 예산을 들여 조선유년감옥을 착공한 것이 소년운동과 비슷한 시기였던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년군은 그만큼 일제엔 경계의 대상이었고 사건이 연달았다.
▲1922년 전남 영암공립보통학교 5∼6년생들은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조선인 멸시등 11개항목의 시정을 건의한 맹휴였는데 주된 이유는 소년군 가입을 금지한 학교처사에 대한 항의였다.
영암교의 맹휴는 인근학교로 확대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총독경찰은 소년일지라도 주동자는 구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27년5월 조선소년군은 소년의 날을 맞아 민중계몽운동등 대규모행사를 계획했는데 경찰은 금지령을 내렸고 이를 어긴 목포등 여러 지구의 소년군간부들을 구속했다.
▲1928년 조선소년군 부사령 전백은 명성여자상업학교의 동맹휴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8년11월 강계지구소년군(제69호대) 학생들의 소년군가입을 금지한 강계보통학교의 처사에 항의, 경고문과 성명서를 발표했다.
학교당국은 소년군가맹 학생의 처벌을 강화하는등 대응조치를 취했고 이에맞서 5∼6년생 전원이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총독경찰은 소년군간부 김군현·임관도·김석낙등을 출판법위반·맹휴선동등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정은 소년군과 강계주민들의 높은 관심으로 초만원을 이루어 수십명의 경찰이 삼엄하게 경계해야했다. 이듬해 3월에야 결심했는데 모두 징역10∼6월에 벌금까지 병과한 가혹한 판결이었지만 공소를 포기,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렇듯 일제의 바람속에서 자란 소년들은 독립운동으로 길을 잡았다. 소년군출신 지사로서 생존해 있는 두사람의 증언.
▲오봉환=6·10만세사건의 소년군 관련범으로 검거되었다가 풀려난뒤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동자군을조직, 활동하다 김구선생의 지도로 남경의 황보군관학교에 들어갔다. 28년 졸업후 의열단에 참여했다. 대일 테러공작이 우리들의 사명이었는데 밀령을 띠고 귀국했다가 인천에서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뒤 33년에야 동지들과 연결되어 조선소년군총본부 간사장으로 복귀했다.
우리들소년군의 항일비밀활동을 사찰해오던 경찰은 37년9월 총사령인 조철호와 나를 구속, 반일활동을 조사하고 소년군을 일본의 보이스카우트인 건아단에 편입시키라고 강요했다. 우리는 완강히 버티다 친일단체로 가느니 자폭키로 결정, 소년군을 해산했다.

<친일강요받자 해체>
내가 독립운동에 나선것처럼 많은 소년단원이 독립군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낭자군에 속해있던 장봉순여사다.
그는 27년 북경으로 망명, 염석산부대에 들어갔으며 일본을 폭격하겠다면서 항공법을 자원했다.
▲이기원=34년9월 소년군 9호대에 들어갔다. 우리들의 통상적 활동도 억압당해 경찰에 붙들려 가기 일쑤였다. 37년 중국으로 망명, 북경대학에 다니면서 항일단체에 참가했는데 검거가 닥쳐 북경을 탈출, 산서소에 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들어갔다. 41년엔 우리 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되었다.
서안에서 활동중 일본헌병대에 체포당해 압송도중 탈출하기도 했는데 45년 천율으로 잠입하다 체포되었으며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있다 8·15를 맞이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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