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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배급망 작동 안 해 … 장마당 400개가 체제 지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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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 함흥 지역의 장마당 모습. 배급제 붕괴로 주민들의 시장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중앙포토]

정종욱(사진)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10일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방식의 통일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 배경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남북 합의에 의한 방식이 아닌 체제 통일, 흡수 통일에 대비한 통준위 활동을 공개하는 등 이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서다. 정부 내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던 비합의 방식의 통일을 거론한 대목도 그렇다.

 정 부위원장의 이 같은 언급은 통일 준비와 관련된 북한 내부 정세와 국내외 환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보수 성향인 ROTC중앙회 주최 조찬포럼 연사로 초대받은 정 부위원장은 통준위를 “평화통일을 전제로 한 조직”이라면서도 “합의 아닌 다른 형태의 통일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가 북한의 사회주의·계획경제를 흡수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북한이 그동안 “북을 먹어 치우려는 체제 통일”이라며 가장 강하게 반발해 온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정 부위원장은 통일독일 사례를 들면서 “독일처럼 흡수 통일을 하면 합의 통일 때보다 비용이 많아진다”며 “합의 통일이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체제·흡수 통일은 우리가 하기 싫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며 합의 이외의 통일에도 대비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배경으로 정 부위원장은 북한 경제의 열악한 실상과 부정부패를 꼽았다. 정 부위원장은 “현재 380~400여 개의 시장(농민시장, 일명 ‘장마당’)이 북한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며 “80~90%의 주민이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값싼 물건을 사다가 높은 가격에 팔아 상당한 부를 축적한 소규모 사회주의 자본가(일명 ‘붉은 자본가’)가 빠르게 등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한 북한에서 배급망이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당국에 의한 공(公)경제가 아니라 장마당을 통한 사(私)경제가 북한 체제를 지탱하고 있다는 게 정 부위원장의 진단이다.

 정 부위원장은 다만 “우리 방식대로 생각해 북한 체제가 금방 무너질 것이라고 보는 건 착각”이라고 강조했다. 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할아버지(김일성 주석), 아버지(김정일 국방위원장)와 다른 정책을 펼 것이라고 본다”며 “시장경제와 공존하는 쪽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를 두고 정 부위원장이 북한 체제에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급변 사태 가능성까지 거론하는 방식으로 대북 압박을 가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김정은 정권에 대해 개혁과 개방 등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자는 “흡수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며 “정 부위원장의 발언은 북한이 통준위와 우리 정부의 통일 노력에 하루빨리 호응하는 게 중요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통일준비위원회=통일시대 기반 구축을 위한 연구·논의와 국민 공감형 통일 청사진 마련을 목표로 설립된 대통령 소속 위원회. 박근혜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정종욱 인천대 석좌교수가 각각 정부·민간 측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7월 15일 출범했으며 민간 전문가 30명과 정부 당국자, 국책연구기관장 등 50여 명의 위원이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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