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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박노해의 작품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시적 진실은 사회 경제적 삶과 무관한 곳에 위치한다」는 생각은 1910∼20년대의 문단 형성기 이래로 지배적 통념을 이루어왔다. 그동안 그 통념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고립 분산된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시도되는데 그쳤던 것이, 70년대에 이르러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창작·비평 양면에 걸쳐 괄목할만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 도전은 거칠게 말하면「시는 삶의 진실의 형상화다」라는 명제를 근간으로 한다.「삶의 진실」이란 그리,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민중적 전망에 의해서만 가능한 사회적·역사적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그 모순구조의 극복을 위한 실천적 역량의 발현이라는 내용 규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시와 삶은 동궤의 것이다」라는 깨달음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노력에서 시인·비평가들은 민중적 전망의 확보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가슴앓이를 겪게된다. 그 가슴앓이는 문화지식인인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식이 민중사실에서 괴리되어 있는데에서, 혹은 그것과 배치되는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가슴앓이야말로 그들을 존재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첫 계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일과 놀이』『모퉁이들』등 근로자 (정확히는 임금노동자) 들의 자기표현을 위한 문집들이 활발히 엮어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삶의 진실에 접근함에 있어서 존재 구속으로부터 자유롭다. 진실탐구에 있어서 그들 자신이 동시에 주체이자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학적 자기 표현은 민중 지향의 전문 문인들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요구이기도 한데, 그 요구란 곧 양자의 화해로운 만남에의 요구다.『삶의 문학』5집과『실천문학』4집에서 근로자들에 의해 생활 현장에서 씌어진 시들을 싣고 있는 것은 그 요구에의 부응으로서 만남을 위한 접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극적 형태의 접점이라면, 적극적 형태의 접점으로는 홍일선(『시와 경제』동인), 박노해(『시와 경제』동인), 박영근(『말과 힘』동인)등 자신이 직접 생산자이면서 전문적 시인인 이들의 문학활동을 꼽을 수 있다.
『시와 경제』2집『일하는 사람들의 미래』(83·6)를 통해 등단하여 최근『실천문학』4집『삶과 노동과 문학』(83·12) 에 4편의 시를 발표한 박노해 (56년생으로 고교졸업후 현재 기능공이다)의 경우 주체객체의 일치를 토대로「삶의 진실」에 박진감 있게 접근하는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10년걸려 목메인 기름밥에
나의 노동은 일당 4천원
오색영롱한 쇼윈도엔 온통바겐세일 나붙고
지하도 옷장수 5백원짜리 쉰 목청이 잦아들고
내 손목 이끄는 밤꽃의 하이얀 미소도
50% 바겐세일이구나
에라 ×팔
나도 바겐세일이라.
3천5백원도 좋고 3천원도 좋으니 팔려가라
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
다만,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
­「바겐세일」(『시와 경제』2집)
같은 작품에 보이듯, 센티멘틀리즘에의 침윤없는 건강한 분노와 그것의 직정적 표현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분노는 다음과 같은 미래지향적 의지의 획득으로 이어져 그것이 단순히 고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어쩔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줏잔을
돌려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의 새벽」(『실천문학』4집)
다만 그 분노와 미래지향적 의지가 그 자체의 표출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낳게 하는 사회구조적 실체를 포착·형상화할 수 있을 방법론적 모색의 주체로 진전할 때 진정으로 탁월한 시적 성과가 가능하리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싶다.
이 적극적 접점이 과연 민중적 전망의 확보에 있어서 일정한 진전을 의미할 것인지, 혹은 그와 반대로 문화지식인의 가슴앓이로의 수렴으로 이끌린 위험은 없는 것인지 계속적인 반성과 주목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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