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 〈3〉거인족에 대한 유키와 수리의 토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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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무슨 거인을 말하는 거지. 거인은 없어. 그러니까 증명할 수 없어.”

유키는 얼굴에 비웃음을 깔며 단언했지만 수리는 개의치 않았다.

“아프리카에는 여러 종류의 호미니드(Hominid)들이 있었지. 그 중에 키가 큰 자이언트, 즉 거인들이 있었다고 하지. 무려 180센티미터나 되는. 하하.”

일러스트=임수연

유키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자, 앉아봐. 쑤리.”

수리가 앉았다. 유키도 따라 앉았다.

“쑤리. 잘 들어봐. 인류가 아주 작아진 적은 있었지.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서 살았던 플로레스인 혹은 호모 플로레시엔스라고 하는 인류가 있었지. 계통상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후손들인데, 키가 겨우 1미터 정도였어.”

수리는 이에 질세라 뻐기면서 받아 쳤다.

“알아, 알아. 호빗(Hobbit)이라고도 하지. 1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 에렉투스들이 유럽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20만~30만 년 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키가 작지 않았어.”

수리의 입에서 굵은 침이 튀었다. 실로 오랜만의 열변이었다.

“그들은 플로레스 섬에 고립되었어. 천적도 없이 먹이사슬도 없이 살면서 20만~30만 년을 보내는 동안 그만 왜소해지고 말았지. 치열한 생존경쟁이 필요 없었던 그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가 1만 5000년 전쯤 그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멸종해버리고 없었어.”

유키도 질세라 굵은 침을 팍팍 튀겼다.

“쑤리. 그런데 호미니드들 중에 자이언트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그들이 아프리카를 탈출한 적이 있을까? 난 없다고 봐.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

유키는 오메가 고고학교의 일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젠틀하게 토론을 이끌었다. 하지만 수리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마치 선거철만 되면 떠들어대는 떠돌이 정치인 같아졌다.

“난 가능하다고 확신해. 호모 에렉투스는 수십만 년에 걸쳐서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전 대륙에 진출했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야. 그러니까 자이언트도 가능하다고 봐.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동했을 거야.”

유키는 반박했다.

“호미니드와 호모 에렉투스는 뇌의 용적이 달라. 탈출할 정도의 지능이 되지 못했어. 그건 아니야, 쑤리.”

수리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유키의 논리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봐. 유키. 뇌의 용적보다 더 중요한 건 생존 본능이거든.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탈출했을 때 아프리카는 기후의 변화 때문에 먹을 게 거의 없었지. 모든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를 탈출한 게 아니야. 그들 중 일부였지. 약 30명 정도였어.”

그러나 유키는 정곡을 찔렀다.

“그래서 그들이 어디로 갔는데?”

수리는 당황했지만 곧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이언트 중에 하나의 무리만 아프리카를 떠나 어딘가에 성공적으로 정착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난 그걸 증명할 거야. 아빠도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떠난 거라고.”

유키는 갑자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처럼 우호적인 웃음이었다. 그러자 수리는 더 열심이었다.

“그들이 분명히 이동해서, 분명히 살아남아서, 분명히 어떤 문명을 이루었고, 분명히 어떤 문자를 남겼어. 지금은 사라진 문자….”

사비가 와락 외쳤다.

“롱고롱고.”

마루도 덩달아 외쳤다.

“이스터섬!”

수리는 비장했다. 막 출사표를 던진 장수 같았다.

“이스터섬의 모아이(Moai) 거인 석상은 분명히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어.”

수리와 열변을 토하면서 토론하던 유키가 수리의 손을 꽈악 잡았다.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수리야. 네가 꼭 밝혀주길 바란다. 학교 강당은 걱정하지 마라. 내게 맡겨.”

수리와 유키는 서로 포옹까지 하며 격려했다.

“낯선 광경인 걸. 이건 무슨 분위기? 조금 전에 싸우다가 왜 저러는 거지? 쳇.”

마루, 그리고 유키의 똘마니들이 구시렁거렸다.

“역시 오메가 고고학교의 학생다워. 1등급과 4등급의 토론 클래스.”

사비가 방긋방긋 웃었다.

설립자 동상을 지킨 골리 선생님의 발표

그때였다. 골리 선생님과 베로 선생님이 닭대가리 동상을 가지고 나왔다. 물론 우악스러운 골리 선생님이 그 동상을 가뿐히 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감탄을 하며 손뼉을 쳤다.

“그 와중에 골리 선생님이 설립자 동상을 살렸어. 아마 선생님은 이제 기간제 교사에서 정규직 교사로 전환될 거야. 잘됐다.”

사비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골리 선생님이 손을 번쩍 들어 학생들의 뜨거운 함성을 잠시 잠재웠다.

“오늘 발표할 것이 있단다.”

모두들 일시에 침묵했다.

“베로 선생님과 결혼할 거야.”

골리 선생님은 활짝 웃었다. 올림픽 경기의 마라톤 선수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바로 그 순간과 닮은 희열을 온 얼굴로 표현했다. 본래 깨알같이 작은 눈코입이 흐지부지 뭉개졌다. 그러나 베로 선생님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급기야 호흡마저 거칠어지더니 그만 기절해버렸다. 골리 선생님은 베로 선생님을 양팔로 안아 들고 걸었다.

“선생님, 신혼여행 가세요?”

수리가 눈치 없이 장난을 쳤다. 사비가 수리를 째려보았다.

“지나쳐. 얼마나 괴로우시겠어? 여자로선 치욕적인 거야. 저러다 자살이라도 하시면 어떻게 해?”

“공룡이 자살하는 거 봤어?”

순간 골리 선생님이 베로 선생님을 툭 떨어트렸다. 베로 선생님은 데굴데굴 굴렀다. 골리 선생님의 코에서 결혼을 갈망하는 처녀의 순결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공포의 콧김이 분사되자 수리는 소름이 돋았다.

“긴급상황이다. 도망가자!”

수리가 먼저 달렸고 사비와 마루가 뒤를 쫓아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수리가 무언가에 걸려 와당탕 넘어졌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유키가 달리는 수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이다.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 어딜 도망가? 비겁하게.”

“아니 또 언제 깡패로 돌변한 거야? 너의 진정한 캐릭터가 뭐냐?”

수리는 치미는 화를 누르며 일어나 코와 입의 피를 쓱 닦았다.

“피다. 피.”

마루가 호들갑이었다.

“쑤리. 이 싸움을 끝내자.”

유키는 다시 싸움을 할 자세를 취했지만 수리는 손사래를 쳤다.

“싫어. 난 널 가만둘래.”

사비와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다워. 처세의 달인.”

하지만 어느새 유키가 수리의 면상을 한 대 갈겼다. 수리의 얼굴은 더 엉망이 되었다.

“수리야. 그냥 싸워, 싸워.”

마루가 수리를 다그쳤지만 수리는 평소와 달리 머뭇거렸다.

“얘들아! 도망가, 어서. 골리 선생님이야!”

수리는 이 말과 함께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사비도 마루도 뛰었다. 한참을 뛰다보니 수리는 숨이 턱에 닿을 듯 가빠졌다.

“가만, 내가 왜 뛰고 있지? 이건 꿈도 아니잖아?”

수리는 갑자기 멈추었다. 사비와 마루도 멈추었다.

“골리 선생님이 쫓아오고 있잖아? 멈추면 어떡해?”

사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수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리 선생님이 도착했다. 콧김은 아직 푹푹 거렸다.

“선생님, 생각해보니까 제가 베로 선생님의 어머니의 집을 알아요.”

골리 선생님은 슬쩍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제가 베로 선생님과 베로 선생님의 어머니를 만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장래의 남편과 시어머니예요.”

골리 선생님의 눈이 바르르 떨리며 가늘게 찢어졌다.

“정말이야?”

“제가 친하거든요.”

이제 골리 선생님의 콧김은 잦아들었다.

“누구랑? 어머니랑?”

수리는 조용히 눈알을 데굴 굴렸다. 사비와 마루는 수리의 가상 시나리오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 어머니도 친하죠. 그런데 어머니가 키우시는 고양이….”

수리는 점점 뚜쟁이의 말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고양이와 친하구나?”

골리 선생님은 다시 돌아온 희망에 잔뜩 들떴다.

“아, 그 고양이랑 함께 산책한 적 있는 어떤 강아지를 알아요. 그리고 어떤 강아지와 함께 뛰어 놀았던 어떤 강아지가 바로 저희 옆 집 강아지예요.”

사비와 마루는 헷갈렸다. 웃느라 바빴다. 골리 선생님은 좋아라 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수리.”

골리 선생님은 천생 여자의 말투였다.

“선생님이 말할 기회를 주시지 않았잖아요?”

골리 선생님은 미안한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언제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수리는 척척 장단을 맞추었다.

“음, 일단 내일 오전 9시 30분이요. 어때요?”

골리 선생님은 안절부절못했다.

“어쩌지? 10시 30분 전은 어때? 내가 그 시간에 야채를 먹거든. 난 채식주의자야.”

수리는 애써 고민하는 척했다.

“그래도 9시 30분이 좋은데? 어쩌죠?”

“수리야. 제발. 10시 30분 전으로 해줘, 응? 이렇게 부탁할게.”

골리 선생님은 애절하게 수리를 쳐다보았다.

“좋아요. 까짓것. 그럼 내일 10시 30분 전에 저희 아지트 오리온으로 오세요. 거기서 함께 움직여요.”

수리와 골리 선생님은 서로 손바닥을 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윤은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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